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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주절주절,,,,

1대간 9정맥을 마치면서

by 사니조은 2019. 12. 27.








나를 알고 있는 주변 분들도 1+9가 뭔지를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기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나에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기쁠 때 또는 여행이 가고 싶어질 때 또는 반대로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할 때,뭔가의 무게에 짖누릴 때 배낭매고 산에 들어 바람소리,새소리,물소리,낙엽소리 들으며 걸으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뭐가 중요하지?

그런 자문을 하다보면 어느새 삶의 의욕이나 짖누르던 뭔가의 방향이 결정되곤 했었다.


2003년 회사원 시절 어느날 갑자기 뭔가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우연히 병원에서 10일간의 병원 신세를 지고 운동삼아 관악산을 찾아 다녔다.

그 '운동삼아서'가 차츰 산에 자주 가게 되고 그러다 뭔가 의미있는 산행이 없나 알아보다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눈에 띄었다.

2006년에 시작한 백두대간,,,그리고 9개의 정맥산행을 한 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속에 개인적인 일이 많았다.

회사원-자영업 그리고 다시 회사원,,,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나이는 벌써 60을 바라보고 있다.중년이 초로의 길을 들어서기 직전이랄까,,,


성격도 많이 변했다.

까칠스러운 성격도 무디어 졌고,화를 덜 내게 되었고,돈을 많이 벌려고 아둥바둥하기 보다는 맞춰서 사는 맛에 길들여 졌다.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다.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 변화 속의 내재해 있는 것은 산을 알게 되면서 쌓인 내공이다.

산처럼 되고 싶은 삶의 방향을 찾은 것이다.

화려하고 우아한 것은 절대 아니다.오히려 반대인 부분이 많기에 의욕의 상실 또는 나이에 따른 변화가 아니가 가끔 자문해 본다.

맞다.그 말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의 삶은 그렇게 방향을 맞추기로 했다.

어자피 인생은 어디로 어디를 선택하더라도 만족은 없다.

만족보다는 부족,채움보다는 비움의 삶을 살고 싶다.


홀로 산행 중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때 그랬다.

음습한 안부를 내려가는데 갑자기 사방이 일체 무음의 세계에 빠졌다.

그리곤 10여미터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 하나가 살랑살랑 내려 떨어진다.

그러다 땅과 마주칠 때 천둥 번개 치는 듯한 엄청난 날카로운 폭음,,,

그것은 무서움이었다.

내 마음 속 그 무서운 생각이 그런 무서운 폭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떠 올랐다.

그 경험이 '삶과 죽음','산과 나',그리고 '자연과 나'라는 각기 다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깨닳았다.

내가 무섭거나 두렵움을 느낀 것도 마음에서,생각에서 잠시 머문 생각일 뿐 실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행 중 무수이 많이 스쳤던 무덤도 더 이상 두렵거나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호남정맥 주월산과 존제산을 넘어 도착한 백이산,그 산 정상에 있는 무덤 옆 밴취 밑에서 침낭과 비닐을 덮고 땡그렁 땡그렁 대는 철탑의 쇠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가끔 어둠 속의 뭔가의 정체가 있을 것 같아 비닐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고,습기찬 밑바닥 위에서 잠을 자는 듯 마는 듯 하루를 보냈었다.


13년 세월 속의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난 세세하지 못한 단점으로 알바를 수 없이 많이 했다.

지금은 핸폰 속의 트랙을 심어 이동경로를 알 수 있어 알바 가능성이 줄었지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런 것이 없거나 값이 비싸고 사용 방법도 어려워 알바는 나의 산행 중 일과였다.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나니 오히려 그 알바의 경험이 그 당시에는 고통스럽고 화가 났지만 오히려 추억으로 더 또렷이 남는 건 인생의 반전이랄까? 아직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산행기를 뒤척이면 찾을 수 있겠지만 장소와 시간은 기억 못하겠지만 이런 경험들도 있었다.


어느 뜨거운 여름

얼린 물병을 몇 개 가져 갔지만 그 것으로는 여름의 열기를 다스리기 어려운 때,,,

도로가는 어느 때 보다 뜨거운 때인데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는 걸인이 보였다.

(나중에 산행기를 찾아 그때의 상황을 보니 낙남정맥 부련이재의 도로였으며 1916.6.7일이니 그렇게 무더운 날은 아니었지만 더운 날로 기억하고 있었다.)

쉬면서 기다리니 영락없는 거지였다.

사업하다 폭망해 가족과 생이별하고 죽으려고 발버둥치다 세상 구경이나 하고 가자며 여기까지 왔단다.

자고 먹는 것은 도로따라 걸으면 있는 교회에서 해결했으며 때로는 절에서 해결했다고 한다.

나는 얼린 물병 뿐이 줄 게 없었다.다만 그의 인생도 또 다른 뭔가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 이해하고 싶다.

인생도 제로섬 게임아닌가.


호남정맥 조계산 가는 길에 만난 분,,,

서울?에서 고향인 고흥까지 10일 걸어서 내려왔다는 분을 산 길에서 만났다.

네이버로 하루치 걸어야 할 길들을 핸폰으로 정리한 것을 보여 준다.

도로따라 걷다 산길로 와서 나와 만난 것이다.

젊은이처럼 국토 횡단하는 것은 아니고 초로의 사람이,,,

은퇴하고 방황하는 건가?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고민 중인가?

여러 생각이 떠 올랐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간단한 인사말을 뒤로 하고 헤어졌지만 오랜 여운이 남는다.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다녔기에 산행보다도 대중교통 이용이 더 어려웠다.

접근과 탈출,,,

그러다 보니 히치하이킹(이하 히치)을 많이 했었다.

그 분들 덕에 마칠 수 있었다 생각한다.

세상은 험해도 아직은 인간이 살 만한 세상이구나,

꽃보다는 사람이 아름답구나,,,

그런 생각이 나게 만든 분들이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산을 타다가 저녁 무렵 알바해서 잘 못 내려와 한참을 걸어 마을에 도착했지만

버스정거장도,좌로 가야 하는 지,우로 가야 하는 지 모르겠고,,,

불빛은 있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고,,,

참,난감한 그 때,,,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버스 불빛,,,무조건 탔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


또 어떤 때는 포크레인을 실은 커다란 트럭,,,

분해될 것 같은 굉음을 내며 나를 터미널에 내려주시던 트럭 기사분,정말 감사합니다.


어느 시골 작은 버스,,,

새벽 승객이라는 나 홀로.

한적한 시골 산길,단풍난 길을 유유자적 다닐 수 있어 부럽다고 하니 버스 기사분이 그런 말 말라하신다.

하루 미니 버스로 350~400km를 달린다고 하신다.

고속도로면 모르겠는데 꾸불꾸불한 산길 같은 도로길을 그렇게 많이 다니신다고 한다.

같은 코스를 달리는 것이 아니고 차 번호판만 바꿔서 이곳저곳 다니신다 하신다.

월급은 250~300만원 지역마다 편차가 있었다.


또 생각나는 한 분이 있는데 지금도 궁금하다.

낙동정맥갈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역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터미널이 같은 곳에 있는 경우도 있고 떨어진 곳에 있는데 포항은 떨어져 있다.

저녁과 술한잔을 할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커다란 식당,,,문 닫기 전인가 보다.

저녁되냐 물어보니 문닫을려다 내가 불쌍해? 보였는 지 식사하란다.

그러면서 같이 술한잔,,,

내가 부러웠단다.배낭 매고 자유롭게 다니는 것 보니,,,

그래서 문을 다시 열었는 지,,,

나이는 나랑 같고,,,

자녀 3명?인데 첫 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하신다.

전직은 부부 같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어찌해서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사스가 와서 망쳐 놓더니 메르스 사건때 아주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단다.

겨우 빚으로 연명,,,,

가게를 접자니 줬던 권리금도 못받고 다 팔고 나면 1억도 안되 빚 잔치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다시는 이런 식당의 주인장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빚을 계속 지고 가자니 이 또한 죽을 맛,,,

몸은 고생으로 뼈 마디마디 아프지 않은 데는 없고 병들고,,,그래서 내가 한없이 부러웠단다.


그랬다.난 누군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때 나도 엄청 힘든 때였다.인생 최악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부러워 하는 인생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삶이 정답인가?

삶의 방정식에 정답은 있는가?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있는가?


난,그 대답에 답할 정답만 지금 찾았다.

그 것이 정답이든 아니든 난 최선이라 생각할 뿐,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싶다.




 

 

 

 

 





1대간과 1정간 13정맥,,,

북한과 남한의 한반도 땅,그 땅의 삶의 터전이었던 산줄기 그리고 그 산줄기에서 시작된 물줄기,,,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살과 피였다.

평야가 드문 그 땅에 산은 삶의 터전이었고 그 척박함은 삶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늘이 준 고통이었기에 극복하고 삶을 이루어 왔기에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이 된 그 산줄기와 물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이라 후손들에게 알려주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있었을 어려움은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런 소중한 자산을,소중함을 모른채 일제시대에 거치면서 잃어 버릴 위기에 처했었다.

국토의 생김새가 중국에 언제 먹힐 지 모르는 나약한 토끼같다고 교육을 시켰을 때도

나라의 맥을 끊어 버릴 심산으로 국토의 혈맥에 쇠파이프를 박을 때도 그들을 막지 못했었다.

우리의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이기겠는가?


우연히 발견한 산경표처럼

우연히 산을 다니기 시작하게 된 등산이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산을 다니면서 산을 매개체로 만난 많은 분이 있다.

그 선답자 분들의 산행기가 없었으면 아마도 1+9 완주를 못했을 것 같다.

그 분들을 인터넷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만나 한번도 못 뵌 분들도 있고 실제 만남을 가진 분들도 있다.

각자 힘이 되어주고 응원하곤 했었다.

그러던 중 운명을 달라신 분들도 있다.

뫼향(바람솔)님,이거종님,신공식님,,,나는 가끔 지금도 그분들의 카페나 블로그에 들어간다.

이 분들과의 만남은 한번도 없었다.그 분들은 실체는 없지만 아직 나의 마음 속엔 산행기로 살아있다.


1+9졸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을 때 수헌님이 마지막 산행을 같이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성봉현님,산으로님,,,1+9 축하를 해주시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오셨다.

오실려고는 했지만 이미 오신다는 분들이 있다는 연락에 조용히 뒤에서 응원해 주신 고인돌 형님,마음으로 축하를 보내주신 양산박님,최상배님,,,

감사합니다.





[구드래나루터에서 1+9 기념사진<좌로 부터 성봉현님,사니조은,수헌님,산으로님>]




그리고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돌아 올 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 안 가고 소파 의자에서 리모콘이나 돌리고 있는 나를 보곤 자꾸 어디로 안가냐며 궁금해 한다.

요즘 추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연말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 그런거야,,,하곤 속으로 웃는다.


마음 속으로 내년을 설계하고 있다.

영원한 친구와 같이 지낼 궁리에 빠져 있다.


수헌님이 플랑카드를 만들려고 하니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시기에 지난 13년 동안의 사진을 뒤적이니 나의 사진은 몇 장없다.

기록을 위해 찍기는 좋아 했지만 정작 나의 사진은 몇 장없다.


찾은 몇 장의 사진으로 그 때의 추억을 되 살려보면서 글을 마친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비워야겠다.












































































































































사니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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