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恥百年] ⑩일제 침략으로 유린당한 지명
호랑이 기운 한반도를 토끼로…약한 존재, 열등감 조장
일제의 한반도 지명 변경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전과 이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이전에는 한반도 땅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반도 풍수형국을 왜곡하거나 지배에 유리한 전략적 발판을 마련하는데 꼭 필요한 바다와 섬을 일본의 것으로 개칭했다. 반면 이후는 한반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생활공간과 주요 상징공간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개명해 지명에 남아있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
필자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한반도의 땅 모양이 토끼 형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정설인 양 굳게 믿었다. 오십대 후반 연령층은 초·중교 시절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토끼 형상(兎形)에 비유한 견해는 한일병합 직전인 1908년에 발간된 '소년'지 창간호의 '봉길이지리공부'(鳳吉伊地理工夫)라는 란에 게재된 일본 지리·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교수의 한반도 풍수형국도(風水形局圖)에서 비롯된다.
조선 광물 탐사요원으로 파견된 그는 한반도를 마치 중국 대륙을 향해 앞발을 들고 있는 토끼 형상과 같다면서 관서(평안도)를 토끼의 머리와 목, 관북(함경도)을 귀, 황해도의 서해쪽 돌출부를 앞발, 경기도를 배(腹), 관동(강원도)을 등, 삼남(충청· 전라· 경상)을 토끼의 하부에 해당하는 뒷다리와 뒷발 및 꼬리 부분으로 각각 비유했다.
풍수지리사상의 형국론에서 땅은 그 외관 모양이 어떤 형상(形相·形象)을 띠고 있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기운을 가진다고 해석한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한반도 형상을 호랑이에 비유했다. 조선 중기 천문·지리학자 격암 남사고(南師古·1509~1571)와 육당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한반도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했고, 포항시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함에도 일제는 한반도 형상을 나약한 토끼로 규정하고, 교육기관을 통해 우리 백성에게 널리 유포했는데, 이는 한반도는 나약한 기운을 가진 땅이기에 일본이 지배해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제식민지 정당론의 근거로 삼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1889)에 의한 근대자본주의국가로의 개혁 성과를 바탕으로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본격화한다. 제국주의 영토팽창 전략에서는 지배대상 육지로 연결되는 바다를 자국의 바다 또는 호수로 만드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일제는 한반도와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동해에 대한 해상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1876) 체결을 통해 조선의 3개항(부산, 원산, 인천) 개항을 요구, 동해 해상항로를 확보했고, 세계의 고지도에서 동해, 조선해, 한국해, 동양해, 일본해 등으로 표기되던 동해의 명칭을 19세기 말부터는‘일본해' 표기가 대세를 이루도록 했다.
또 일본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러일전쟁(1904~1905)의 동해해전을 대비한 작전계획 수립 과정에서 발틱함대의 예상항로 길목에 있는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가치에 주목했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독도와 울릉도에 망루와 무선전선기지를 설치했고, 1905년 2월 22일에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명명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해 일본 영토로 삼았다. 일본은 같은 해 5월 27일~28일 독도 근해에서 벌어진 동해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에는 한일강제병합을 하기에 이른다.
일제는 조선왕조가 자주독립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1897년에 성립한 대한제국의 실체를 하루빨리 해체하고, 일본이 지배하는 단순한 영역으로 전락시키기 위해 한반도를 조선으로 호칭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통치의 최고기관인 조선총독부 설치령을 1910년 9월 30일 공포하고 10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는데, 이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漢城府)를 일본식 도시명 경성부(京城府)로 개명하고 경기도 관할 하에 두어 그 지위를 격하시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한반도의 자원 수탈과 통치 편의를 위해서 지도 제작과 지명 변경도 단행한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한반도 전역에 대한 평판측량 실시로 1대 5만 지형도를 제작하고, 주요 도시에 대해서는 1대 2만5천 지형도를 제작했다. 지도제작사업과 병행해 1914년에는 부(府), 군(郡), 면(面), 동(洞), 리(里)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하고, 아울러 지도에 표기되는 행정구역 명칭을 비롯해 취락, 도로, 산지, 하천, 평야, 해안, 숲, 주요 시설 등의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정비해 버렸다.
당시 행해진 일본식 한자로의 지명 개칭의 경우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도시의 생활공간 지명에는 일본식 동네 이름과 접미어가 획일적으로 붙여졌다.
동과 리를 대구의 경정(京町·현재의 종로1,2가), 동성정(東城町·동성로1,2,3가), 신정(新町·대신동), 명치정(明治町·계산동), 동운정(東雲町·동인동)처럼 일본식 동 명칭인 ‘마치'(町)를 붙여 불렀다. 대로(大路)는 중앙통(중앙로), 서울의 광화문통(세종로)처럼 ‘도오리'(通)를 붙인 것이다.
우리 고유의 장소 정체성이 반영된 지명도 그 의미와 무관한 일본식 한자로 바뀐 경우가 허다하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은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천321개에서 2천521개로 축소되는데, 이 과정에서 장소의 정체성과 관련 없는 지명이 대거 붙여진다.
예를 들면 대구군에 속하던 상수서(上守西)·상수남(上守南)·하수남(下守南)의 3개면이 폐합돼 가창면(嘉昌面)으로 개칭된 것이라든지, 전국 곳곳의 마을 이름에서 ‘구(龜)’자가 ‘구(九)’자로 변경된 경우가 그 예다.
이뿐만 아니다. 우리 고유의 수많은 우리말 지명이 한자식 지명으로 변조됐다. 솔고개가 송현(松峴), 새터 또는 새마가 신기(新基), 한실(골) 또는 큰골이 대곡(大谷), 장터가 장기(場基), 대밭골이 죽전(竹田) 등으로 개칭당해 아름다운 우리말 땅이름이 사라진 것이다. 오늘날 대구시 달서구의 송현동과 죽전동, 경북 고령읍의 장기리 등은 위와 같은 이유로 탄생한 지명이다.
또 일본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상징성이 담긴 중요한 장소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개명함으로써 그 땅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를 부정함과 더불어 일본 땅의 이미지가 나도록 왜곡하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이 지명에 즐겨 사용하던 ‘왕(王)’자를 ‘황(皇)’ 또는 ‘왕(旺)’으로 바꿔 지도에 표기한 것은 우리 땅에서 일본 천황의 이미지를 느끼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속리산 천왕봉(天王峰)과 계룡산 천왕봉 등이 1918년 조선 총독부가 만든 지형도에서부터 천황봉(天皇峰)으로 고쳐졌고, 설악산의 토왕성 폭포(土王城瀑布) 등이 토왕성(土旺城) 폭포로 왜곡된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명은 지표면(땅)의 상이한 지역이나 해역(海域) 또는 장소를 구별하도록 하는 땅 이름이다. 하지만 지명은 일반적으로 육지나 바다를 삶터로 해온 사람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각 지역이나 장소의 고유성, 특수성, 역사성 등을 바탕으로 명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명은 땅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적 귀속성까지도 나타내주는 지리학적 언어이기도 하다. 일제는 지명이 갖는 이러한 의미를 잘 인식하고 한반도 침략과 통치수단으로 한반도의 주요 지명을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일제잔재 청산의 하나로 일본식 지명을 대대적으로 교정한 바 있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광복 6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땅에는 일본식 지명이 버젓이 남아있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도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동해 명칭의 경우 2007년 현재 세계 75개국에서 발간된 353개 지도에서 일본해로 단독 표기한 것이 전체의 약 74%를 차지하고, 동해·일본해를 병기한 경우는 약 2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독도도 한일 간 영토 분쟁으로 국제사회에서는 리앙쿠르 암석(Liancourt rocks)으로 더 많이 표기되고 있다.
녹색연합은 2005년 2월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백두대간 지명조사 결과,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32개 시·군에서 왜곡된 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자연 및 행정지명 22개를 찾아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땅과 바다는 아직도 일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해와 독도 명칭이 국제사회에서 공인받고, 국토에 남아있는 일본식 지명이 완전히 청산될 때 우리 땅은 비로소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이재하(경북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우리 이름 되찾은 호미곶 -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한반도 형상을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에 비유했고, 조선의 천문·지리학자인 남사고는 포항의 호미곶 형상을 호랑이 꼬리라고 했다. 호미곶의 이름은 2001년 변경되기 전까지 불행하게도 일제가 고친 장기갑으로 오랜 기간 쓰여졌다. | |
선조들은 오랜 기간 한반도의 형상을 호랑이에 비유했으나 우리를 식민지화한 일제는 호랑이를 연약한 '토끼'로 돌변시켜 버렸다. 사진은 일제 때 일본의 지리학자인 고토 분지로의 한반도 풍수형국도. |
'사는 이야기 >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하준/장석준 집안,,, (0) | 2010.11.13 |
---|---|
[펌] 백두대간 등산로 열어주세요~~(조은산님) (0) | 2010.11.05 |
커피,,, (0) | 2010.09.30 |
실감나는 세상이야기 (0) | 2010.07.13 |
KT는 사기꾼!!!!!!! 5년 동안 더블프리 요금을 부당 착취 당하다. (0) | 2010.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