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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아름다운 사람들

장기려 박사를 아직 모르시나요.

by 사니조은 2009. 4. 2.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기려 박사님에 대한 방송이 있었다.

너무도 무지했던,장기려 박사님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성인을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병원비가 없는 가난한 사람을 병원을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한 그 분

그리고 그가 환자에게 잘못된 시술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환자의 일생의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던 그 분

아내 김봉숙과 사별하고 40년간을 홀로 수절한 그 분

의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라는 실천을 보여 주신 그 분,,,

 

그의 삶 자체가 성인의 길이었던 장기려 박사님을 그대는 아직 몰시고 계신가??

그래서 오늘 블로그에 관련 자료를 찾아 봐서 올려 다른 사람들에게도 장기려 박사님의 행적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아래--퍼온 글들> --------------------------

 

 

얼마전 TV책을 말하다"이주일의 도서 선정에서 장기려 ,그 사람" 책의 내용이 소개된바 있다

함께 시청하던 아이에게 장기려 , 그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르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럼 테레사 수녀는 아느냐 하였더니 선뜻 알고 있다고 한다 외국의 성자는 알면서

한국의 성자는 모르는 현실이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무소유 원칙으로 인생을 보내고 10년전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부산대 의대교수로,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땐 방 한칸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참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의사로서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살다간 '장기려는 삶과 신앙 '한국의 슈바이쳐''사랑의 의사''무소유의 삶'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이광수 소설 "사랑" 속 주인공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장기려’를 쳤을 때 춘원의 소설 속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과 선생이 많이 닮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말한다.

나를 두고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좀 어긋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

춘원이 입원하고 있었을 때 ……나는 개를 대상으로 위와 알레르기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사랑" 속에

안빈이 개, 토끼, 고양이를 대상으로 해서 공포의 감정 실험으로 ‘안피노톡신제1호’를 발견했다는 구절이 있다든가,

안빈의 인간상에서 나를 연상케 하는 점이 많다는 등의 이유로 동료들 중에는 내가 안빈의 모델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작품 인물들도 저자가 창조해 낸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98~101쪽)


또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한다
선생의 아내 김봉숙은 희생과 절대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며, 결혼할 때 선생과 한 모든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선생은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하고,

1950년 12월 월남한 이후로 북에 두고온 아내를 기리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선생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던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선생 사택으로 쳐들어 올 때도, 그동안 조국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만큼 일했으니

이제 미국으로 건너와 여생을 편하게 지내자는 돈 많은 여성의 청혼도 끝끝내 이겨냈다. (92쪽)

그는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고도 전한다
김일성 주석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소문은 선생이 북에 있을 때부터 있었다.

선생은 1988년에 쓴 글에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김일성을 세 번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맨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보건부 부국장 이성숙과 소련 고문관을 따라 김일성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48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지낸 김용범의 수술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선생을 부른 것. 세 번째는 김윤범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이날은 서로 대화는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김일성은 머리 뒤의 혹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수술을 못 맡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94~196쪽)


 

또한 신군부 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식사 제의를 거절했다도 전한다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철권 정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에 내려왔고,

저녁식사 자리에 선생을 초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주례를 서 주기로 한 예비 신랑·신부와의 저녁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초대를 거절했다. 예비 신랑이 혹 선생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을 하자, 선생은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렇지. 당일 전화해서 오라가라 하는 경우가 어딨어”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415~417쪽)

그는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날 수 있는 방북기회를 놓쳤다 정부 당국이 북한에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 줄 테니 방북

신청을 하라고 제안하자, 선생은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가고 싶겠소.

그 사람들도 다 보내 준다면 나도 갈 생각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양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417~419쪽)

[출처] 장기려' 그 사람|작성자 해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