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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아름다운 사람들

“제발 일어나세요, 영등포 슈바이처”

by 사니조은 2008. 4. 17.
16일 오전 서울 반포동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 한 침대에 하얀 거즈로 눈을 가린 60대 환자가 누워 있었다. 환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입에 연결된 산소호흡기의 작동에 맞춰 가슴만 힘겹게 미동할 뿐이었다.

그는 선우경식(63) 요셉의원 원장이다. 노숙자와 극빈층을 상대로 20년간 무료 진료를 해 와 ‘영등포 쪽방촌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선우 원장은 3년간의 위암 투병 끝에 뇌사 상태에 빠졌다.

중환자실 앞에는 김모(41)씨가 초조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20년 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던 김씨는 선우 원장에게서 무료 진료를 받고 새 삶을 찾았다. 선우 원장은 약 처방뿐 아니라 방황하던 김씨에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치료받은 뒤 김씨는 요셉의원에서 자원봉사 일을 해 왔다. 1년 전부터는 막노동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고 있다. 김씨는 “하느님이 원장님을 너무 일찍 데려가시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 외에도 중환자실 입구에는 무료 진료를 받았던 환자와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선우 원장의 쾌유를 바랐다.

1969년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한 선우 원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센터에서 내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도 잘나가는 병원에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선우 원장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한림대 병원에서 잠시 근무하던 그는 83년부터 당시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관악구 신림동에서 무료 의술 봉사를 했다. 당시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던 그곳에서 선우 원장은 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환자를 업고 다니며 자원봉사를 펼쳤다. 봉사활동을 이끌던 한 신부가 그에게 계속 남아 진료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는 87년 8월 신림 1동에 무료 자선 병원인 요셉의원을 세웠다.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이다.

당시엔 전 국민 건강보험이 시행되기 전이라 빈민들은 아파도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의 병원은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개원 초기 운영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의료기구는 성모병원에서 쓰던 것을 얻어 와야 했다. 의약품을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한 한 회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가난한 병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을 보며 버텼다.

요셉의원은 97년 5월 화려한 영등포 역사 뒤편에 있는 쪽방촌으로 옮겨 왔다.

지금까지 42만 명의 영세민 환자와 노숙자, 외국인 근로자가 이 병원을 거쳐 갔다. 현재 요셉의원은 자원봉사에 나서 교대로 무료 진료를 해 주는 80명의 의사·간호사와 일반 봉사자 600여 명이 꾸려 가고 있다. 매월 2000여 명의 후원자가 1000원에서 몇 만원까지 보내 주는 기부금이 재정의 전부다.

선우 원장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61년 선친이 지은 작은 집에서 그대로 살아왔다. 미국에 사는 여동생들이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나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거부했다고 한다.

선우 원장은 2003년 호암상(사회봉사 부문)을 받았다.

“폐인이 다된 사람이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 취직이라도 해 바나나 한 봉지 사 들고 찾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맛을 알면 이 일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죠.”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주머니가 부르면 딴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 말해 왔던 선우 원장은 의사자격증 하나만을 남긴 채 영면의 길을 향하고 있다.


강기헌·홍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