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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아름다운 사람들

우간다에서 '나 홀로 의료봉사 18년' 의사 유덕중씨

by 사니조은 2010. 1. 25.

우간다에서 '나 홀로 의료봉사 18년' 의사 유덕중씨
딸 뇌염걸려 죽을 고비도 자금난 불구, 병원 건립 중
우간다·한국 지원은 전무 그래도 목표 있어 행복해

18년 전인 1992년, 서른세 살 유덕중(51)씨는 우간다로 향했다.

 세 살·두 살 딸들과 셋째(아들)를 임신한 부인이 눈에 밟혔지만, 아프리카 의료봉사는 이 젊은 의사의 오랜 꿈이었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의 물라고 국립병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체온계·혈압계는커녕 소독약 냄새조차 없었다.

1500개 침대에 에이즈와 결핵 환자만 넘쳤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루 40~50명의 입원 환자를 봤지만 약이 없으니 죽어나가는 사람이 태반이었어요.

그나마 병원에 온 사람은 행운이었죠.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 없이 생을 마감합니다.

보람은커녕 좌절이 심했어요."

유씨는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을 마친 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갔다.

이후 2년짜리 계약을 계속 갱신해가며 남았다. 2008년 코이카가 파견의 제도를 없앤 후에도, 그는 남아서 진료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하는 이는 드물다. 치안도 불안하고, 질병에 걸릴 위험도 높기 때문이다.

 그는 "나도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다 주삿바늘에 찔리고, 결핵이 옮아 늑막염으로 한참 고생했었다"고 했다.

우간다 도착 8개월 후에 합류한 가족의 고생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초등학교 2학년 큰딸이 뇌염에 걸렸을 때 혼비백산했다.

 경련을 일으키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만 인공호흡기를 갖춘 병원은 하나도 없었다. 전기마저 끊긴 터라, 부부는 어둠 속에서 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몇 주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이젠 정말 귀국하자, 내가 발버둥친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었어요.

그런데… 떠날 수 없었습니다. 도움을 갈망하는 눈빛들을 등지고 내가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싶었어요.

 딸도 '나는 아빠 덕에 나았지만, 아빠가 가면 여기 사람들은 어떡하느냐'고 하더군요."

귀국 대신, 그는 '병원다운 병원을 짓자'는 목표를 세웠다. 우간다 병원의 문제는 의료시설 부족에 앞서, 환자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점이었다.

"의사·간호사 간 협업 시스템이 전무했어요. 약이나 의료기기 도난도 흔하고요. 병원식(食)도 없어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나갔죠.

독재정권은 가난한 사람들 고통에 무관심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이웃 나라에 가서 치료하고 오면 그만이었죠."

그는 2002년부터 병원을 짓고 있다. 의대에서 시간당 9000원짜리 강사로 일해서 번 돈도 쏟아붓고 있다.

그런 그가 우간다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2000년 '내과 분야 최고 의사상'이 전부다. 고국의 지원도 전혀 없었다.

"우리 정부에서 몇 분 오셨기에, 현지 사정과 병원 짓는 취지를 설명했어요. 가슴 아파하더군요.

그런데 몇 달 뒤 난데없이 경고장이 날아왔어요. '개인병원을 만들어 영리를 추구하려는 것 아니냐'고요.

대사관도 귀찮다는 반응이고요. 정부 도움은 포기했습니다."

유씨는 작년부터 지인들과 함께 모금에 나섰다. 80병상을 갖춘 6층 병원을 짓는데, 2층 골조까지 올린 상태에서 돈이 모자라 잠시 귀국했다.

(이메일 yoouga@yahoo.com)

그는 한국에도 우간다에도 집 한 채 없다. 그래도 "사는 목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전에는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은 많지 않느냐고. 왜 가족까지 고생시키느냐고요.

가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차원이 다른 가난이지요."

그의 아이들은 모두 이웃 케냐의 국제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두 딸은 이후 연세대에 입학해 귀국했고, 아들은 아직 고3이다. 이제 우간다에는 부부만 단출하게 남았다

 

 
유덕중씨는“한국에 있었다면 돈은 벌었겠지만, 사는 게 허무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들은‘우리 아빠 너무 멋지다’고 해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라고 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