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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아름다운 사람들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

by 사니조은 2010. 4. 15.

 
인물사진 
이태석 신부
출생-사망
1962년 (부산광역시) - 2010년 1월 14일
학력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
수상
2009년 제2회 한미자랑스런의사상
2007년 제23회 보령의료봉사상
2006년 제7회 인제인성대상 특별상
경력
1991 살레시오회
 

지난 2월의 마지막 날,
아프리카 한복판 수단의 남쪽 작은 마을.
남 수단에 하나밖에 없는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 선 흑인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영정 사진이라고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눈물로 그를 보냈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종족, 딩카족이다.
유목민인 그들은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아랫니 세 개를 뽑고 이마에는 칼로 브이(V)자 모양의 상처를 낸다.
북수단과 남수단의 오랜 내전은 분노와 증오만을 남겼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딩카족에게 가장 큰 수치다.
바로 그들이 운 것이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해온 이탈리아 사제도 처음 보는 모습이라며 놀라워했다.

검은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 톤즈로 가는 길, 그 위험한 여정 2박 3일
- 이태석 신부는 2008년 10월 휴가차 한국에 들렀다가 말기 대장암을 발견했다. 투병 끝에 결국 지난 1월 14일 선종했다. 투병 중에도 톤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제작진은 이태석 신부의 투병당시 화면과 사진을 들고 톤즈로 떠났다. 제작진이 톤즈로 향한 것은 지난 2월 22일. 그러나, 그날 새벽 아프리카 현지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톤즈 부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20여명이 죽었고, 길은 봉쇄됐었으며, UN에서 외국인들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 1월 7일에도 부족 간의 전쟁으로 140명이 희생된 바 있다. 출발을 이틀 늦췄지만, 길은 뚫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남쪽으로 돌아가는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남 수단 자치정부가 발행하는 별도의 통행증도 받았다. 비행기를 2번 갈아타고 흙길을 달려 드디어 톤즈에 입성했다. 서울을 떠난 지 2박 3일만이었다.

#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난 의사.
- 이태석 신부는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을 보장받는 의사를 버리고 사제가 됐다. 그는 10남매 중 아홉 번째였다. 노모와 형제들이 눈물로 잡았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곳이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였다. 아랍계가 지배하는 북수단과 원주민이 사는 남수단은 (83년)부터 내전을 벌여왔고,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한번에 30만 명이 희생된 인류 최대의 비극 다르푸르 사태도 2003년 이 땅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와랍주 톤즈는 내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이다. 긴급 구호 전문가인 한비야씨도 자신이 가본 곳 중 가장 최악이라고 했다. 이 신부는 2001년 톤즈에 정착했다. 그는 왜 이곳을 찾은 것일까? 제작진은 톤즈를 방문한 적이 있는 지인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동영상을 모았다. 화면 속의 그는 불빛도 없는 움막 진료실에서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초기 화면(2003년)과 2007년 화면을 비교해보면, 그가 이곳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 “신부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
- 이태석 신부가 떠난 빈자리는 참으로 커 보였다. 환자로 북적이던 진료실은 텅 비어 있었고 수술실 침대는 어지럽게 널려 있다. 여기저기서 구해온 약들로 꽉 차있던 약 보관실은 빈자리가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지금도 빈 병원을 찾아와 이신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병원을 찾은 2명의 중년 여성은 신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통곡했다. 대부분의 톤즈 사람들은 신부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한센병(나병) 환자들이다. 이 신부는 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주고 아침저녁으로 들러 세심하게 살폈다. 제작진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신부의 사진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손가락이 없어진 뭉툭한 손으로 사진 속 이신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흙집 창가에 사진을 올려놓고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가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자신들에게 해주었다고 했다.

#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이유 있는 눈물
- 이태석 신부는 전쟁으로 몸도 마음도 가난해진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톤즈강의 모래를 퍼다 날라 학교를 지었다.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 기둥을 옮겨와 농구대도 만들었다. 내전에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2005년 놀라운 계획을 실행한다.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 트럼펫, 클라리넷등 악기를 구해오고, 반듯한 단복도 마련해 입혔다. 스스로 악기 연주법을 공부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총’과 ‘칼’을 녹여서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브라스 밴드는 그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제작진이 만난 밴드 부원들은 신부에게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치며 자기들끼리 밴드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신부의 마지막 투병 화면을 지켜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을 멈춘 아이들은 이 신부와의 아주 특별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 제작진의 한마디
故 이태석 신부,
그의 길지 않았던 삶의 행적을 따라가며
제작진은 국내외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태석 신부에 대해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부터 보였습니다.
의사 선배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며 목이 메었고,
올해 일흔의 이탈리아 사제는
자신을 데려가고 대신 할 일 많은
이 신부의 생명을 살려달라 기도했었다며 울먹였습니다.
톤즈에서 만난 13살 소년은
이태석 신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보라고 하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심하게 들썩였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현지 통역도
아이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따라 울었습니다.
제작진도 눈물을 피할 길이 없어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눈물로 기억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날,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