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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간9정맥(산경표)/백두대간(完)

<12> 백두대간 19차 (10구간)<큰재~회룡재~개터재~백학산~지기재~신의터재>

by 사니조은 2007. 8. 3.

백두대간 19차 (10구간)

<큰재~회룡재~개터재~백학산~지기재~신의터재>

 

 

2007.1.20 (토) / 쌀쌀했으나 오후는 춥지 않았던 날씨

거리 및 시간 : 24.47km, 8시간 35분

 

주요 지점 시간 소요시간/누계시간 구간/누계거리 비 고
큰재 08:00 0 0  
임도 08:28 -    
회룡재 09:03 1시간 3분 / 1시간 3분 -  
개터재 09:34 31분 / 1시간 34분 5.65 / 5.65  
윗왕실재 10:52 1시간 18분 / 2시간 52분 -  
백학산 12:05 1시간 13분 / 4시간 5분 6.87 / 12.52 점심30분
임도 12:50 -    
개머리재 13:58 1시간 53분 / 5시간 58분 4.7 / 17.22  
(안심산) 14:38 30분 / 6시간 38분   알바20분
지기재 15:15 37분 / 7시간 15분 2.7 / 19.92  
바위 슬랩 15:47 -    
송전탑 16:26 -    
신의터재 16:35 1시간 20분 / 8시간 35분 4.55 / 24.47  

            구간 거리는 포항 셀파 자료 기준 / 누계시간은 일부 주요 지점만 표기

        

 

 

 

丁亥年 백두대간 첫걸음을

큰재에서 신의터재까지 가기로 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납니다.

 

 

25km에 이르는 먼거리이지만

고도가 낮고 고도차도 심하지 않은 구간.

 

 

추풍령부터 시작하여 화령재까지 중화지구라로 불리는 곳입니다.

대간 중 고도로 따지자면 가장 낮고 능선의 고도차도 없고

잡풀도 많고 농로,과수원 등과 자주 접할 수 있는 구간입니다.

 

 

중화지구라 하여 중화요리,동북공정 등을 연상시켜 조금 느끼한 어감입니다.

그 어원이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런 자료가 있더군요.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 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5월호)

 

 

 

옛 조선의 행정구역 단위( -- 부 -- 목 -- 군 -- 현 – 리)

상주목 아래의 증모현과 화령면을 뭉뚱그려 중화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

 

 

하여간 이 구간은

거져 먹는 구간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큰재에서 출발 신의터재에 도착해서 기운이 남아 돌아

화령재까지도 욕심을 내 더 진행하기도 하고,,

하여간 다른 구간에 비해 쉬운 구간이라고 합니다만,,

 

 

만만히 보다 보니 출발도 늦게 5시에 출발

북수원 IC -> 영동 ->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옥천 휴게소에서 콩나물 해장국 2인분을 3명의 아침식사로 한 뒤

황간 IC에서 빠져 나와 우회전하여 49à68번 지방도로를 타고

68번 도로상에 있는 큰재에 도착하니 벌써 8시입니다.

대간 들머리 들어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집니다.

 

 

 

 

 

 큰재 ~ 백학산 <08;00~12;05> 4시간 05분>

 

 

큰재 08:00

임도 08:28

회룡재 09:03

개터재 09:34 / 1시간 34분

윗왕실재 10:52

백학산 12:05 / 4시간 5분

 

 

폐쇄된 옥산 초교에 주차한 뒤

동네 뒷동산에 가는 느낌의 산길로 접어듭니다.

 

처음 산행 1시간은 언제나 힘이 들지만 자주 가던 관악산도 안 가고

괴으름을 피웠더니 더 한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처형은 처음부터 저 멀리 내빼고

마눌 뒤에서 졸졸 따라 갑니다.

 

30분도 채 못되어 회룡목장과 연결된 임도 하나 나오고

임도를 따라 가니 회룡목장 입구에서 다시 산으로 들어가며

회룡목장을 왼쪽에 두고 대간길이 10분 동안이나 이어집니다.

 

회룡재에는 상주시에서 설치해 논 이정표도 있습니다.

회룡재의 해발 고도가 340M이라 하는군요.

비교적 넓은 길이 양쪽으로 나 있고 지기재 산장에서

달아 논 안내판에는 큰재에서 1시간,개터재까지도 1시간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큰재에서 1시간 3분,개터재까지 31분 걸렸습니다.

 

 

회룡재에서 개터재까지는 평탄한 산책길로 이어집니다.

마루금을 버리고 능선을 따라 걷는,,오른쪽 왼쪽 모두 마을들이

쉽게 가까이 보이는 그러한 길을 가다보니 회룡재에서 30분만에 개터재에 도착합니다

개터재에는 큰재에서 먼저 출발한 夫子 대간꾼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울산에서 왔다는 오늘 유일하게 만나는 대간꾼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대간 여행을 한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아버지에 멋진 아들 부자 대간꾼입니다.

이 부자 대간꾼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지기재까지 같이 가게됩니다.

 

별 특징도 없고,전망도 없고 평탄한 산책길 같은 길을 개터재 출발한 지

한시간이 좀 넘으니 동물이동통로가 있는 윗왕실재에 도착합니다.

 

윗왕실재에서 부터는 조금식 고도가 높아지면서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며 백학산으로 향합니다.

 

나중에 택시기사분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이곳에는 백두대간상의 백학산이 있고

주변에 이름이 비슷한 백화산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 보니 백두대간상의 백학산은 고도가 615m이고

충북 영동군 황간면과 경북 상주시 모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화산은 933m입니다.

백두대간이 완전 쪼그라 들었습니다.ㅋㅋ

 

 

한차례 땀을 흘리고 마루금에 오르자 다시 산책길로 이어지며

곧 백학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큰재에서 출발한 지 4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당초 계획은 백학산을 지나 나오는 임도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일찍 시장기가 발동하여 백학산 정상에서 30분의 점심식사를 한 후  다시 출발합니다.

 

 

 

 # 1.출발 전 폐쇄된 옥산초교에서

 

 

# 2. 큰재에서 출발

  

# 3.

 

# 4. 큰재에서 30여분 진행하니 회룡목장과 연결된 임도가 나오고


 

 

 # 5. 버스가 다니나 봅니다. 

 

#  6. 회룡목장 정문

 

 # 7. 회룡목장 정문에서 

 

 # 8.

 # 9. 근처에 은방울꽂이 많은 가 봅니다.

 

 # 10. 회룡재

 

 # 11.

 

 # 12. 순한 산책길

 

 # 13.

 

 # 14. 개터재

 

 # 15.

 # 16.

 

 # 17.

 

 # 18. 윗왕실재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홀대모 흔적,,

 

 # 27. 지나가는 길에

 

 # 28.

 

 # 29. 백학산 정상

 # 30. 백학산 정상에서 점심 식사 후 출발

 # 31. 백학산에서

 

 

 

  백학산 ~ 신의터재 <12;05 ~ 16;35> 4시간 

 

 

 

 

 

임도 12:50

개머리재 13:58

안심산 14:38

지기재 15:15

바위 15:47

송전탑 16:26

신의터재 16:35

 

 

백학산 정상에서 출발한 지 20여분만에 임도가 나타나고

임도따라 약간 내려가다 임도 왼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대간길은 이어집니다.

 

지도를 보니 이 임도는 지나온 개터재와 회룡재까지 서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왼쪽의 작은 산길로 접어 들어 소나무 숲속입니다.

전망이 없는 30분의 길을 걷자 앞이 트이면서 마을이 보이고

좀 더 진행하자 마을 소로가 나타나고 다시 산으로 들어갑니다.

 

산으로 접어드나 했더니 바로 왼쪽 편으로 인삼 재배밭이 나오고

또 밭길을 지나 잡목이 우거진 길을 지나고 밭 옆길도 지나고

과수원도 나오고,, 그냥 평범한 시골길.

 

잠시 후 왕복 2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여기가 개머리재인가 봅니다.이정표도 없어 단지 추측할 뿐,,,

개머리의 형상을 닯았다고 하는데,,,,

 

도로를 건너 과수원과 묘지 사잇길로 접어들고

평탄한,순한길이 이어집니다.

30분 지나니 둘산악회에서 코팅지에 안심산이라는 이정표를 걸어 둔 곳이 도착합니다.

 

여기서 생각지도 않았던 알바를 하게 됩니다.

안심산 이정표를 지나 바로에 왼쪽으로 달려있는

표지기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 묘지 한기 지나 표지기가 왼쪽으로 가라고 하여

왼쪽 직각으로 틀어 내려가니 가파른 등로에는 솔가지가 수북히 쌓여 있어 미끄럽습니다.

가는 도중 대간 표지기가 있고 누군가 내려간 흔적이 있어

알바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마눌과 조심조심 내려가니 갑자기 손폰이 울립니다.

 

처형입니다.

왜 안오느냐고 합니다.

“안심산 코팅지 지나 왼쪽길로 내려 가고 있는데요??”했더니

처형도 “나도 그 쪽으로 내려가다 안 오길래 다시 올라와

안심산 코팅지가 걸린 곳으로 되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울산에서 오신 부자 대간꾼도 처형이 있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 도체 어케된 일이야???

 

다시 안심산 코팅지가 걸린 곳에서 만나기로 하로 다시 되돌아 올라 갑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심산 코팅지가 걸린 곳에

바로 지나 왼쪽으로 표지기가 달려 있더군요.

 

마눌과 저는 그것을 못보고 좀 더 지나 왼쪽에 나 있는 길로

내려가 알바를 한 꼴이 되어 버렸고,,

그런데 우리가 간 곳에 있는 대간 표지기들은 뭔고???

많이 달려 있던데???

지도 상으로 보면 우리가 간 길이 맞는 듯한데,,,

집에 와 나중에 확인해 봐도 그런 알바를 한 분이 없나 봅니다.TT

 

결국 알 수 없는 20분의 알바를 하고 다시 내려갑니다.

아까 그 길과는 달리 다소 완만한 비탈길 그리고 솔잎이 아닌 활엽수 낙엽이 등로를 덮고 있습니다.

 

15분 내려오니 왕복 2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여기가 지기재 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와서 적기재라 하였는데

지기재로 언제,어떻게 바뀌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신의터재로 가는 길은 도로를 건너 나있는 시멘트 포장길로

쭉 따라 들어가다가 작은 대나무 숲이 나옵니다.

어릴적 자란 집 뒤에 대나무가 많아 대나무만 보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대나무 숲으로 난 길을 접어 드니 이번에는 미루나무가 나옵니다.

 

미루나무를 지나 도로를 쭉 따고 들어가다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고 잠시 후 바위 슬랩이 나옵니다.

지도상에는 슬랩이라고 표기 된 곳인가 봅니다.

 

슬랩을 지나 잠시 후 송전탑이 나오고 좀 더 가니 도로가 나옵니다.

오늘의 목적지 신의터재입니다.

 

신의터재 표지석,정자 등도 있어 상주시에서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잠시 후 예약한 택시를 타고 차가 있는 큰재로 갑니다.

택시비 20,000냥.

 

다음번 갈령에서 신의터재 택시비도 20,000냥이라고 하는군요.

 

오는 길에 이 곳 팔음 포도는 당도가 18도이고

전국 최고라고 자랑이 대단하더군요.

상주는 삼백의 고장으로 곶감,쌀,누에고치로 유명한 줄 알았는데

포도로도 유명하다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할 것이 걱정입니다.

대간길 산행하는 것보다 힘든 것이 교통체증이라,,,

 

 

 

 # 32. 백학산 내려가는 길

 

 # 33. 백학산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임도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인삼 재배지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개머리재

 

 # 53. 이쁜 꽂(?)이 피어있기에,,

 

 

 # 54, 추운 겨울에도 생생한 요놈이 뭔지 모르겠군요.

 

 

 # 55.

 

 # 56. 장남감 운전대에도 표지기를ㅋㅋ

 

 # 57. 지도에 없는 안심산,,여기서 20분 알바를 하고 맙니다.

 # 58. 표지기가 상당히 길어 찍어놨는데,, 여기서 잔설 있는 곳에서 좌틀해서 가야 하는데 직진하는 바람에

 

 # 59. 다시 되돌아 와서 찍은 사진,,울산 부자 대간꾼도 다시 만나고

 # 60. 지기재 가기전 

 # 61. 

 # 62.

 

 # 63. 지기재

 

 # 64.

 # 65. 대나무 숲을 끼고 오른쪽으로,,

 # 66.

 # 67

 

 

 # 68. 미루나무

 

 

 # 69.

 # 70.

 # 71.

 

 # 72. 겨우 트인 전망

 

 # 73. 바위 슬랩

 # 74. 송전탑

 

 # 75. 신의터재

 

 

  큰재 ~ 신의터재 산행시 참고 사항 

 

 

 

큰재에서 신의터재가는 길은

-         능선이 완만하고 고도차고 별로 없으며

-         긴급 상황 발생시 마을로 내려 오기가 용이하고

-         중간 식수 구하기가 비교적 쉬운 구간이며

-         여름에는 잡목,수풀 등이 많을 것으로 보임

 

 

  표지기가 적절한 곳에 있고 안내판과 표지기만 잘 따라 오면

     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으나 급하게 꺽여지는 구간이 있어 주의 진행해야 함

 

방향 주의 구간

-         들머리 : 옥산초교 옆길

-         개머리재를 지나 지기재 가기 전 좌측 꺽여지는 곳에서 주의 진행

(알바 20분 경험)

둘산악회에서 안심산이라고 코팅지로 이정표를 걸어두었으며

이정표 바로 왼쪽에 표지기 많이 달려있음

-         기타 구간 표지기 참고 진행

 

급경사 주의 구간 : 별 어려움 없었음

 

    

식수 구할 곳 : 식수 구할 곳이 별로 없음

-        마을 등과 쉽게 접근할 수 있음

-        탈출구 등은 매우 많음

 큰재에서 신의터재 : 20,000원 (화동택시 011-522-2838) (신의터재 근처임) 

 

 

 

 

 참고 자료 !!!

 

 

 

○ 교통 : 자가용 왕복 450km

 

북수원à영동à경부à황간IC-> 우회전 à 49à 68번 도로

   

○ 경비 : 약 11만원 (차량 유류비 포함)

    유류비 : 약 6만원

톨게이트비 20,000 (9,800+9,800)

택시비 20,000  

저녁 10,000

 

준비물 : 

   물 : 약 3.5리터 (보온병 1.5리터 + 500ml 4병)

먹거리: 점심, 간식(커피,사과,초코릿 과자 약간)

휴대품 : 모자,수건,장갑,스틱,지도(1;50,000 조선일보 백두대간 제공)

비상용 물품 : 비상약품(대일밴드+스프레이파스,신경근육이완제)

   기타 : 헤드렌턴2+디카+건전지(핸폰,디카,헤드렌턴)

            휴지,비닐봉지(쓰레기)

 

 

 

알고가기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상주 화령

----중화(中化) 지역, 그 천년의 싸움터

 


속세를 떠나지 못하는 산

 

 보은에서 5리 어름이면 상주 길과 속리산 길이 나뉜다.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나는 산이 아니다. 이름하여 산은 결코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 다만 풍진 사바가 늘 산을 버리고 어름더듬 속세의 경계를 짓는다. 속리산은 항용 속세에 머무는데 정작 속세는 유별하여 자꾸만 속리산을 떠난다. 산문이란 본래 오는 이 가로막지 않고 가는 이 부여잡지 않는 곳. 산이 또한 거기 있기 위하여 오래 전 아주 먼 곳을 떠나오고, 거기 있으되 늘 어디론가 마음 실려가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속세에 머물되 속되지 않고, 속되지 않되 늘 속세에 머무는 산. 그리하여 지금은 헐값에 쓰이는 저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는 말도 알고 보면 흔쾌히 속리산을 닮은 말이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한강의 물과 헤어지니 그 곳이 바로 속리산 천황봉(1058)이다. 문장대(1033)에서 천황봉으로 달리는 속리산 연봉의 동쪽은 낙동강이요, 서쪽 법주사로 흘러내린 골물은 장차 아름다운 달래강이 되어 북쪽을 거슬러 오르다가 충주 탄금대 아래서 남한강에 몸을 섞는다.

천황봉 남쪽의 골물은 그로부터 보은과 청산을 지나 금강의 대청호로 흘러드니 그 여울(금강)과 달래강(남한강)을 가르는 산줄기가 바로 천황봉에서 말티고개를 건너 청주의 산성 고개, 청안의 질마재, 괴산의 모래재, 음성의 행티 고개를 지나 안성의 칠현산(516)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이다.


속리산 천황봉은 세 갈래의 큰물(한강, 금강, 낙동강)을 거느리는 산이다. 그런데 이 말을 속리산 문장대로 바꾸면 금세 틀린다. 옛글 역시 모두 이 꼭지점을 속리산 문장대로 기록했던 까닭에 지금도 자주 일어나는 잘못이지만 문장대는 크게 보아 한강과 낙동강을 나누는 백두대간의 봉우리일 뿐이다.

천황봉을 지난 백두대간은 형제봉 (803)과 봉황산(741)을 지나 다시 큰산 황악(1111)에 닿을 때까지 그저 막무가내로 몸을 낮추어 화령(320)을 만들고 추풍령(200)을 이루며 겨우겨우 그 명맥을 잇는다. 

 

 

논두렁과 밭두렁의 백두대간

 

소백산맥은 삼국의 발전기에 자연의 요새로 방어선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전초기지였다.
삼국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글이면 흔히 만나는 대목이다. 고쳐 말하자면 옛날의 백두대간은 언제나 자연의 국경이었고, 국경이었으므로 당연히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격전장이었다는 뜻이다.

미루어 보면, 저 용맹스런 고구려로부터 신라를 보호해준 것 역시 백두대간이었고, 백제와 신라의 충돌을 지리적으로 중재하던 것 또한 백두대간이었다.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천연의 성(城). 어쩌다가 애써 넘어가 보아도 후방의 지원이 쉽지 않은 탓에 이내 다시 쫓겨 넘어와야만 했던 것이 바로 그 옛날의 백두대간이다.


산천의 전통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오늘날의 도계(道界) 또한 변함없이 백두대간을 따라 마루 금을 그었으니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다만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다 보면 몇 군데 대간과 도계가 어긋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우구치 마을은 강원으로 대간의 도래기재를 넘어갔고,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부석면 남대리는 충북으로 각각 대간의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상주 화령 일대의 무려 6개의 면은 대간을 넘어 깊숙이 충북 땅으로 들어섰으며 전북 남원의 운봉읍을 비롯한 3개의 면은 경남으로 대간의 여원재를 넘어 팔량치에서 도계를 이룬다.


우구치나 마락리, 남대리는 채 한 마을도 못 되는 산간이니 다만 제쳐놓고, 대규모로 대간의 경계를 침범한 화령과 여원재 일대는 모두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표고가 낮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떤 곳은 논두렁 밭두렁으로 근근히 대간의 명맥을 잇는 곳도 있으니 말 그대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국이다.

백두대간 본연의 임무인 물가름은 여전하여 변함없이 그 논두렁 밭두렁을 경계로 강과 강이 나뉘지만 바야흐로 지리적인 경계로서 지방을 구분짓는 산줄기의 기세는 볼품없이 초라하다. 그 두 곳은 당연히 신라와 백제를 이어주는 오작교인 동시에 치열한 싸움터였다.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속리산 갈림길에서 상주 길로 30리쯤이면 충북과 경북이 도계를 이루는 적암이다. 풍수에서 십 승지의 하나로 꼽는 명당을 품었다는 구병산(876) 아래 그저 평평한 들판 위에서 엉거주춤 도계가 나뉜다. 그로부터 백두대간의 화령까지는 30리 길이다.

속리산 형제봉 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도계는 적암을 지나고 백화산(933)을 휘돌아 추풍령 위쪽 국수봉(684)에 이르러야 다시 백두대간과 만난다.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 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짐작컨대, 오늘날까지 중화 지역이 경상도 땅으로 뿌리를 벋은 것은 아마도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국경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원의 팔량치 일대가 비록 백두대간의 동쪽이지만 전라도 땅으로 굳어진 연유도 비슷한 내력이 숨었을 터이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그 두 곳은 싸움의 결과에 따라 쉴새없이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 두 곳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물론 이는 사람이 걷거나 아니면 기껏 말이나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종류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싸움이 있었다. 얼마 전, 문장대 용화 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사건이 그것이다.

용화는 바로 화북면의 마을이니 경상도 땅이지만 백두대간을 넘어 온 탓에 그 물은 달래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 수계이다. 돈벌이는 경상도가 하지만 수질 오염의 대가는 고스란히 충북의 몫이다. 결국 경북 쪽의 개발 포기로 단락을 맺은 이 사건은 지방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 쟁이었다.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서면사무소가 있는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 達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