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테마산행/일반산행

강화 고려산 <강화남문~남산~노적산~고려산~낙조봉~미꾸지>

by 사니조은 2019. 4. 8.


강화 고려산

<강화남문~남산~노적산~고려산~낙조봉~미꾸지>

○ 2019.4.6(토)

○ 홀로

○ 5시간/12km?


<고려산 정상에서 바라 본 진달래 능선과 낙조봉>








0930 강화터미널


0945 강화 남문

1015 남장대

1100 노적산 갈림길

1115 도로(좌측 고비고개)

1137 인천시 학생교육원 시설물/강화나들이길

1150 갈림길(좌 고비고개/우 고려산/직진 강화나들이길)

1230 정상

1330 낙조봉

1445 미꾸지고개




산행기>>>>>>>>>>>>>>>>>>>>>>>>>>>>>>>>>>>>>>>>>>>>>>>>>>>>>>>>>>>>>>>>>>




강화터미널에서 고려산 가는 길은 청련사 또는 백련사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거나 고비고개로 가는 버스 편을 이용해서 가면 된다.터미널 안에 안내하는 곳에서 차편을 문의하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다.


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강화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 고려산으로 간다.

국화저수지로 접근했던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강화 남문-남장대를 먼저 보고 접근하기로 한다.

한번 와 본 길이라 버스에서 내린 뒤 두리번두리번 거리지 않아도 되고

지름길로 찾아 갈 수 있고,또 그 여유로운 마음에 못보던 강화 남문 앞 떡집에서 점심꺼리용 떡하나 사는 여유를 누리며 남문으로 오른다.


남문으로 올라가 남장대라는 정자에 이른다.남산의 정상인 셈이다.

전후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곳,전술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전망이 좋은 곳이다.

 

어제 강원도 고성의 산불 여파의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작은 연기 피어 오르는 곳의 상황을 무전 교신하는 감시원을 뒤로 하고 노적산 방향으로 길을 잡아 진행한다.

가는 도중 산길샘을 가동시키며 가야 할 고려산을 염두해 두고 진행한다.

길은 산책길,,,노적산은 서울의 용마산처럼 공동묘역이었다.

어쩌면 이 묘 밑에는 예전 몽고항쟁이나 임난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이들의 뼈들도 묻혀 있을 것이다.

그들의 혼을 마음으로나 위로해 본다.

간간이 교행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좌,우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으로 가면 바로 노적산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꾼다.

노적산 정상에 가 봐야 별 볼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현대식 건물의 청암 로뎀의 건물 입구 도로건너편 산을 깍아 만든 길을 지나 도로를 만난다.

좌측으로 가면 고려산과 혈구산의 경계인 고비고개로 나는 도로.

도로 따라 좌측으로 올라가면 쉽고 편한데 지난 번 고비고개로 내려왔기에 그냥 도로 따라가기는 싫어 도로 건너편 희미한 앞 산길을 바로 치고 오르니 유격훈련장 같은 인천 학생교육원 시설이라는 곳에 이른다.

그 곳에서 다시 강화나들이길과 만나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사거리 산길이다.

여기서 좌측이면 고비고개로 가는 길,우측은 고려산 정상 가는 길,직진길은 강화나들이길이다.

당연히 우측 고려산 정상으로 향한다.


이 곳부터 고려산 정상까지 가파른 길이었다.

고려산 정상부는 군부대 시설물이 차지하고 있어 좌측 헬기장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다.

다시 우측으로 좀 가니 진달래군락지가는 데크 길이 보인다.

젤 사람들이 젤 많이 오는 유명한 길이라 돈들여 데크길로 만들어 놨다.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는 고려산 정상에서 낙조봉,적석사,미꾸지 방향으로 간다.

그 길이 고려산의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한 곳,,,진달래 군락지라고 이정표에 설명되어 있지만

아직은 꽃봉우리 조차 맺히지 못한,,,진달래능선의 화려함은 아직은 이른 것 같다.


괜시리 마음 성급한 사람들만 허물킨 듯하지만 사람들은 오랜만의 나들이길이라 그런지 나름 전망을 즐기는 듯하다.

고려산의 유명한 진달래군락지는 정상에서 낙조봉 가는 방향,고려산 서쪽 방향에 있다.

아직은 칙칙한 분위기만 연출하고 있지만 삼삼오오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사람을 뒤로 하고 낙조봉으로 가는 길은 순하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을 지나고 좌측으로 적조사 가는 갈림길을 지나니 낙조봉.


낙조봉에서 가지고 온 먹거리로 에너지 공급하고 다시 미꾸지 고개 방향으로 간다.

나중에 집에 와서 산행 기록을 보니 고려산 정상~낙조봉 1시간,낙조봉~미꾸지 고개까지는 1시간 15분이었다.

아마도 낙조봉에서 식사 시간 등으로 지체한 시간을 감안하면 낙조봉에서 미꾸지 고개 가는 길도 1시간 거리인 것 같다. 

미꾸지 고개에는 양방향 모두 버스 정거장에 있다.

좌측 방향은 외포리 가는 길이고 우측 방향이 강화터미널 방향이다.

산행 후 터미널에서 4시에 만나기로 한 고인돌 형님을 만나 양재로 이동,순대국+소주 한잔하고 집으로,,,



남문,,,


남문앞 나무


남문의 현판







올라가는 길에 뒤돌아 보고












남장대






한남정맥의 끄트머리인 문수산

















남장대 우측의 고려산




혈구산




노적산 갈림길

좌 노적산 우 혈구산이 보인다.


지금의 위치




고려산



청암 로뎀의 집




인천학생교육원이라는데 유격장같다.


참 잘했어요!!!


우측으로 가면 고비고개,혈구산 가는 길,안부를 지나




정상 올라가는 길에 바라 본 청암 로뎀의 집이 좌측으로 보이고


국화저수지와 문수산



고려산 정상


혈구산



석모도 방향


혈구산과 그 밑에 고비고개를 오가는 도로가 보인다.


고려산 진달래군락지











별립산




진달래군락지는 아직 칙칙하기만


























좌측 적석사




낙조봉,,,정자하나 있으면 좋을 자리











미꾸지 고개 가는 방향






미꾸지 방향은 망월리 방향으로 가야 한다.






혈구산.



낙조봉을 보니 사람들이 보이고


적석사과 혈구산

적석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416년(장수왕 4) 인도승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인도승은 진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절터를 물색하다가 강화도 고려산에 이르러 다섯 빛깔의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를 발견하였다. 그는 다섯 가지 연꽃을 공중으로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지는 곳마다 사찰을 지었는데, 이 절터에는 적련(赤蓮)이 떨어졌으므로 적련사(赤蓮寺)라 하였다.그 뒤 절 이름은 적석사로 바뀌었으며, 1544년(중종 39)과 1574년(선조 7)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593년 묘정(妙淨)이 선당(禪堂)을 중건하였고, 1634년(인조 12) 계현(戒賢)과 삼창(三昌)이 불전(佛殿)을 중수하였으며, 1639년영윤(靈允)이 승당(僧堂)을 중건하였다. 1644년묘정이 누각을 중건하였고, 1705년(숙종 31)학균(學均)이 향로전(香爐殿)을 중건하였으며, 1707년보익(普益)과 승감(勝鑑)이 누각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714년일연(一衍)이 사적비(事蹟碑)를 건립한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다.

































미꾸지 고개






여기서 강화터미널까지 30분?







강화도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으로 강화군의 주도(主島)이다.

행정구역은 강화읍·길상면·선원면·불은면·화도면·양도면·내가면·하점면·양사면·송해면·교동면·삼산면·서도면 등 1개읍 12개면 184개 동리가 있다

(행정리 기준, 법정리 기준 96개). 군청소재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394이다.

면적 411.43㎢, 인구 67,667(2015).해안선 길이는 106.5㎞이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전에는 해구(海口), 혈구(穴口) 등으로 불리다가 이 때에 강화현으로 편제하였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부른 듯하다


강화도의 중심인 강화읍은 고려 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1377년(우왕 3)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부치(府治)가 자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화군 소속된 이래 1994년까지 경기도 강화군에 속하였다.

1995년에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속함에 따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속이 되었다.

예로부터 수도에 인접한 관문으로서, 고려시대의 몽고침입과 조선시대의 병자호란·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삼국시대에 강화군은 고구려의 혈구군이라고 대부분의 문헌에서 기록하고 있으나

<대동지지>에는 백제의 갑비고차현이라 했다.

이는 많은 문헌들이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가 남하정책으로 중부지방을 점령하게 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이곳을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한주(지금의 광주)에 예속시켰다. 고려 태조 때 하음현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에 강화에 합속됨)·교동현이 있었다. 940년에 강화현으로 개칭했다.

몽고의 고려침입으로 1232년 도읍을 강화로 옮겨 지군사로 승격시켰으며,

1270년 개성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 동안 도읍으로 있었다(→ 몽골의 침략).


조선에 들어 1413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피난했다가 환도 후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성이 함락되어 청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숙종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 강화 내성·외성 등을 축조하여 강화의 방비를 강화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성을 함락하여 약 1개월간 머물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군 함정이 잠시 초지진·덕진진·광성보를 함락했다.

1876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 일본과 강화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는 등

조선 후기 서양세력의 물결이 밀려오는 창구로서 강화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별호는 강도·심주(沁州) 등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군으로, 1896년 부로 되었다가,

1906년 다시 강화군으로 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옹진군과 김포군 검단면 및 강화군 전 지역이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한편 1997년 강화대교와 2002년 초지대교의 개통으로 인근 도시들간의 이동 시간이 단축되었다(→ 교동부).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주도인 강화도를 비롯하여 교동도·석모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18개의 무인도가 있다.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바다로 둘러 있고, 동쪽은 좁은 염하를 끼고 김포군과 마주 대한다.

원래 김포반도와 연결된 육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분리되었다.

마니산(468m)·혈구산(466m)·진강산(443m)·고려산(436m) 등 저산성 산지가 솟아 있다.

 황경내·천하골내·용목내 등의 계천이 천정천을 이루면서 해안의 충적지를 통과하여 바다로 흘러간다.

충적지는 대부분 간척사업으로 조성되었다.


연평균기온 10.8℃ 내외, 1월평균기온 -4.5℃ 내외, 8월평균기온 24.4℃ 내외, 연평균강수량은 1,321.1㎜ 정도이다.

겨울이 따뜻하여 강화도 남서부에는 동백나무·초피나무·보양목 등 난대성 식물이 자란다.







고려산(남문~고려산~낙조봉)201904061036.gpx






사니조은>>>>>>>>>>>>>>>>>>>>>>>>>>>>>>>>>>>>>>>>>>>>>>>>>>>>>>>>>>>>>>>>>>>>>

고려산(남문~고려산~낙조봉)201904061036.gpx
0.1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