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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테마산행/일반산행

함백산 <만항재~함백산~중함백~삼거리~적조암입구>

by 사니조은 2019. 2. 3.

 

 

함백산

<만항재~함백산~중함백~삼거리~적조암입구>

 

▣ 2019.02.2일(토)

고인돌님,양산박님

7.26km/ 4시간 35분

 

 

 

<중함백산가는 길에 뒤돌아 본 함백산 정상>

 

 

 

 



 

산행기>>>>>>>>>>>>>>>>>>>>>>>>>>>>>>>>>>>>>>>>>>>>>>>>>>>>>>>>>>>>>>>>>>>>>>>>

 

 

 

오늘의 산행은 고인돌 형님과 태행지맥 마지막 구간인 신흥사-구봉산-와룡산으로 갈려고 했는데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갑자기 남덕유(장수) 쪽으로 가자는 연락에 충북 알프스 구병산 산악회 신청을 마친 양산박님과 연락하여

방향을 바꿔 동행 산행을 하기로 했는데,,,

산악회 덕유 인원이 만땅이라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함백산이었다.

 

2달 동안 무소식이었던 눈구경 산행갈려는 욕망?에 졸지에 3인의 산행 계획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갑작스런 산행 시작은 눈사태?인데 결국 눈구경도 못하고 계획하지 않았던 산행이었고

이중으로 등록한 양산박님은 한쪽 산악회 임금치를 포기하고 함산했으니 개인적으로 출혈이 크다.ㅎ

 

아침에 사당,양재,죽전에서 각각 탑승하여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만항재에 하차하여

함백산으로 올라간다.

정상에는 눈이 없고 중간 쯤에 눈이 좀 있을 뿐,,,

함백산 올라가는 길,

몇일 전 부터 체기가 좀 있어 배가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되 아침도 못하고 오른다.

함백산 정상을 거쳐 중함백산에 가기 전 막걸리와 홍어무침으로 점심,,,

이럴 때 배에 이상이 없다.ㅎ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하산,,,

태백산 하산팀을 태우기 위해 태백산 얼음 축제장으로 이동,간단히 한잔 더하고 집으로,,,

오늘 산행으로는 8km,4시간의 짦은 산행이고 한번은 왔던 산이기에

3인 모두에게 산행 자체로 볼 때는 만족한 산행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의 3인 동행 산행이었고 올해의 산행 계획을 나름 각자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예전 백두대간의 사진과 비교해보며 과거 시간으로 돌아가

당시를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질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올해는 이 두 분과 동행 산행을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여기서 부터 산행 시작

이 지점이 백두대간 길인 지,,,

아마도 사진의 도로 상단에서 좌측 방향으로 진행 한 듯하다.

 

 

태백산 방향

 

 

함백산 정상 방향

 

 

 

 

 

 

 

 

예전에 없던 기원단.

 

 

 

 

 

우측 도로 따라 22km가면 남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가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걱정 없는 푸른 하늘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고

정상석이 빼꼼 보인다.

 

 

함백산 정상 가는 중

 

 

예정에 없었던 바람개비가 많이 생겼다.

풍력과 태양광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친환경적인 것인가 가끔 의문이 생길때도 있다.

 

 

 

 

 

 

 

 

2008년 5월 18일의 사진 1

 

 

 

2008년 5월 18일의 사진 2

 

 

 

2008년 5월 18일의 사진 3

 

 

2008518일의 사진 4

 

 

 

2008.5.18(일) 당시의 산행기 일부 발췌부분

 

흐림+오후 약간의 비

 

 

만항재 05:08 (3.45 km / 3.45 km)

함백산 06:35 (2.85 km / 6.3 km)

헬기장 06:40

제3쉼터 07:24  ---> 중함백의 위치

제2쉼터 07:46  ---> 적조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오전 9시 이전에 두문동재를 넘어라!!!”

 

최근의 다른 산행기에 읽어 보니 화방재~피재 구간에서

야생화 보호 구역으로 통재를 한다고 해서 걱정거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를 또 어찌 넘어야 하나???

 

 

이에 대한 해결책을 여러 모로 궁리해 둔 결과

첫번째 해결책은 공무원 출근 시간 전에 넘는 방법,,,

이 방법은 새벽 야간 산행해야 하는 부담이 있고,,,

 

 

두번째 해결책은 화방재에서 출발하여 두문동재에 간 뒤

통제로 못 가게 될 경우 택시로 피재로 이동,두문동재로 역주행하는 방법,,,

 

 

두가지 방법 모두 처형이나 마눌에겐 잘 통할 지

자신없어 일단 비밀로 해 두었고

일단 부딪혀보자라는 생각으로 출발합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산행기를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과거 시간 여행을 잠시하고,,,

 

 

 

 

 

정상에 사람들이 많아 정상 인증사진은 생략하고 내려간다

 

 

행복한 박대감님,,,

 

 

 

이곳에서 백두대간 할 때 간식을 먹었다고 하는데 기억엔 없다. 

마눌에게 말해보니 여기서 처형이 가지고 오신 쑥떡이 먹었다고 한다.

 

 

 

 

 

 

예전엔 우측 고사목을 보호하기 위해 철조망이 있었다.

 

 

 

 

2008.5.18 오투 스키장 개발 현장

 

 

오른쪽의 오투 스키장의 현재의 모습

 

 

바람개비도 정말 많이 생겼다.

투자대비 효율이 낮다고 하던데,,,

 

 

예전 주목 있느는 곳에 철조망이 있었는데 모두 철거,,,

 

 

 

 

 

 

 

 

 

 

 

 

 

 

 

 

 

 

 

 

나무 박사님들,,,

이 근처에서 막걸리+홍합무침+빵+배+사과

 

 

중함백

 

 

 

 

 

 

 

 

 

 

 

 

 

 

 

 

 

 

 

 

 

 

 

 

 

 

여기서 좌측 적조암으로 내려간다.

 

 

우측의 두문동재 가는 쪽을 바라보고

 

 

 

예전 백두대간 당시의 두문동재

이 곳에 검문한다고 해서 딱지뗄까봐 노심초사,

내려가지 못하고 어물쭈물,,,마눌과 처형이 먼저 내려간다.

딱지떼면 자기들이 안 낸다고 겁도 없이 내려가니

저 앞에 분들이 "괜찬하요,내려오세요"ㅎ

요즘 여기 통제하나 모르겠다.

 

 

물추레나무,자작나무,피나무,,,

 

 

어~!이렇게 큰 나무가 마가목이라구,,,

 

 

 

 

 

정암사 구경도 할려고 했는데 포기하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적조암도 포기,,,

하산 시간이 3시로 알았는데 3시반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적조암이라도 다녀오는건데,,,

 

 

피나무

대동여지도 김정호가 이 나무로 판각했다고 소설로 읽어 본 적이 있다. 

 

 

계곡 얼음,,,

밑에서 부터 얼어 올라와 저런 모양이 된 듯.

 

 

박대감님은 똑같은 코스를 두번이나,,,

오늘은 한 쪽 산악회 입금치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그래도 즐거운 하루를 마치고.

 

 

 

 

 

 

 

 

이 밑으로 내려가면 정암사 방향인데 버스는 뒤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 아래로 내려가도 서울로 갈수 있지만 길게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태백산 얼음 축체장으로 이동

한우 설렁탕(?)에 소주한잔하고 집으로,,,

 

 

 

함백산

태백시와 정선군 사이에 우뚝 솟은 해발 1573m의 함백산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저술한 산경표에는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정선총쇄록에는 상함박, 중함박, 하함박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왜 함백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태백(太白), 대박(大朴), 함백(咸白)이라는 말은 모두크게 밝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에는 함백산을 묘고산이라고 기록했는데 수미산과 같은 뜻으로 대산이며 신산으로 여겨 본적암·심적암·묘적암·은적암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

금대봉

한강 발원지 검룡소 품은 산

태백 여행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하나 있다면 한강발원지 검룡소인데 바로 이 검룡소를 품고 있는 산이 금대봉(金臺峰)이다.

금대봉은 태백산과 함백산을 달려온 백두대간이 싸리재에 이르러 북서쪽에 일궈놓은 산으로 이웃한 대덕산과 더불어 태백시가 자랑하는 식물의 보고로도 유명하다. 해서 이 산에는 산행뿐 아니라 검룡소를 둘러보고 다양한 꽃과 식물을 촬영하려는 생태탐방객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은대봉

강원도 정선군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는 1,442m이다. 함백산의 봉우리인 상함백산, 중함백산(1,505m), 하함백산(1,527.9m), 창옥봉(1,380m) 중 상함백산을 가리킨다. 정암사 절을 세울 때 조성된 금탑, 은탑에서 금대봉(金臺峰)과 은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중략)

낙동강의 원류 발생지는 이곳에서 가까운 천의봉의 동쪽계곡에 자리한 너덜계곡으로 공식 인정되었지만, 은대봉의 은대샘에서 태백시 화전동쪽으로 흘러내리는 황지천(黃池川)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산자락에는 태백광업소와 한국 기차역 중 제일 높은 곳(855m)에 위치한 추전역이 있다. 부근에 정암사, 용연동굴이 있다

 

매봉산

해발 1230m

우리나라에는 매봉(응봉)이란 산이름이 많기도 하다. 백두대간이 강원도 태백시를 지나는 어름에 솟아있는 매봉산(1303.1m)은 높이로도 으뜸이며, 낙동정맥을 분기하며 남한강·낙동강·오십천을 발원케 한다.

또한 고랭지 여름배추의 최초 산지였으며, 현재도 정상 부근 약 45만 평에 여름배추를 재배하고 있다. 1965년 한미재단에서 화전민정착촌사업으로 30만 평을 개간하여 1가구당 4,500평씩 무상으로 나누어주어 41가구를 이주 정착시켰던 산이기도 하다. 정상은 천의봉이란 무게 있는 이름을 소유하고 있다.(자료 월간산)

 

태백 매봉산 정상은 사람이 서있기 힘들 정도의 거센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닥친다. 매봉산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풍력발전기는 날개(프로펠러) 직경만 52m에 달하고 발전타워를 포함하면 전체 높이가 무려 75m에 달해 8기가 한꺼번에 돌아가는 모습은 보는이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태백시가 지난 200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매봉풍력발전단지 조성사업은 지난 8월말까지 총 135억원이 투자돼 모두 8기의 풍력발전기가 설치됐다.
 지난 2004 12월 첫 가동을 시작한 매봉풍력발전단지는 2005년까지 모두 5기의 풍력발전기가 가동돼 지난해 전력 554만㎾h를 생산, 33500만원의 경영수익을 올렸다
.

피재(삼수령)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원도시 태백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금방 이 곳, 삼수령에 닿는다. 삼수령은 우리 나라 땅의 큰 등줄기인 백두대간에서 또다른 큰 산줄기인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지점으로, 이 지점에서 우리 나라 땅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서쪽의 함백, 매봉산 쪽 검룡소에서는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한강이, 남쪽의 태백시 한가운데 황지 연못에서는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낙동강이, 그리고 서쪽 산줄기에서는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오십천이 발원하여 각각의 유역을 형성하는데, 이렇게 큰 세 개의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하여 이름을 삼수령이라 붙인 것이다.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지리학의 근본 원리 '산자분수령'의 의미를 너무나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남한의 4대 강들 중 가장 큰 2개의 강이 이곳에 발원지를 두고 있는 강원도 태백은 가히 남한의 지붕이라 부를 만 하다
.

(
참고로, 숲 속 깊이 위치한 검룡소의 힘찬 모습과, 태백시내 한복판의 공원 안에 있는 은은한 황지연못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되는 면이 있으나, 이 두 장소 모두는 분명히 첫눈에 매우 비범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두문동재(싸리재)

              
세상 문 닫고 돌아앉은 아라리 고개

 
길은 어디에나 있다. 길을 잃은 곳, 그 곳에도 길은 있다. 사람이란 으레 크고 밝은 길에 모여 저마다의 삶을 다투는 법이지만 더러는 저 아주 좁고 어두운 세상의 뒤안길로 슬며시 등을 돌려 세상과는 아예 몇 겹 담을 쌓고 살기도 한다. 어느 길이든 그저 모두 변함없는 세상의 날들이다. ! 누가 함부로 길을 잃었다 하는가? 까마득한 무렵, 산과 들에 짐승들이 먼저 길을 내고 사람들 또한 생각 많은 짐승으로 사는 동안, 길은 그렇게 어디에나 있었다. 그리하여 길이란 잃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버리는 것이다. 시절이 가고 바람이 차가워져 가지 끝에 걸린 나뭇잎 하나 홀연 몸을 던지듯이
.

 
오랜 옛날, 그렇게 길을 떠난 이들이 있었다. 속절없이 버리고 떠난 뒤에야 다시 얻는 세상의 길을 따라 기약도 희망도 없이 그렇게 시나브로 잊혀져 간 이들이 있었다. 훗날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듯 어디 닿을 바 없이 멀리 흘러가 버린 그들의 길을 세상에서 가장 사무치는 길이라 믿었다. 생각 같아서는 어찌 그 길만이 또한 외길이랴 묻고 싶지만은 다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길이라면 대체 무엇이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으랴. 지나왔으므로 돌아보면 더러 아련하고 가고 있으므로 끝내 멈출 수 없는 길. 정선 땅에 가면 길은 모두 하나같이 그렇게 속 깊은 아라리 가락을 탄다
.

 
크게 밝은 땅, 크게 어두운 땅


 
영월에서 해뜨는 쪽으로 40리 밖이 석항(石項)이다. 옛날에 돌항소(乭項所)라는 천민집단 구역이 있었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영월을 떠난 태백 가는 길이 그 석항에 닿으면 서로 갈래를 짓고 둘로 나뉜다. 남쪽 길로는 수라리재와 화방재를 넘어 태백에 닿고 북쪽 길로는 정선을 비켜 사북과 고한을 지나 두문동재를 넘어 또한 태백에 닿는다.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진다는 화방재(935m)와 포장 길이 넘는 고개로는 남한 땅에서 가장 높다는 두문동재(1,268m)가 모두 백두대간의 고개이다
.

 
태백이란 이름의 뿌리는 가깝게는 태백산(1,568m)이며 멀게는 민족의 종산 백두산(2,744m)에 이른다. 태백이란 '크게 밝다'는 뜻이니 한밝달이나 한배달로 등장하는 단군의 조국설화(肇國說話)가 그 근원이다. 본래 태백 땅의 지명에는 황지(黃池)와 장성(長省)이 있었다
.

 
황지는 마을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있어 천황(天潢)이라 부르다가 황지로 바뀌었으니 지금도 태백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그 연못은 낙동강의 시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장성 또한 본래는 장생이라 하여 흔히 일컫는 장승이 많대서 얻은 이름이다. 1981, 탄광이 날로 인구를 불리면서 황지읍과 장성읍을 모아 태백이란 이름으로 시가 되었다
.

 
태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제 1의 광도(鑛都)이다. 일제 무렵,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조선총독부 보유 탄전의 광업권을 인수하여 장성의 석탄을 캐낸 것이 탄광의 시작이다. 태백의 연감을 들추어보니 1981년의 광부 수가 무려 19,375명에 달했다 한다. 집계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2만 명을 훨씬 웃돌았다. 1987년 태백의 석탄 생산량은 640만 톤이나 되어 전국 생산량의 30%에 이르렀다. 강아지들마저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광산촌의 영화. 그러나 그 영화는 이제 흉물스럽게 버려진 탄광과 빈집을 뒤로 한 채 저마다 진폐를 쿨룩이며 대처로 떠난 광부들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

 
아라리 고을 정선에 부는 바람


 
정선은 동쪽으로 동해, 삼척, 태백의 3개 시와 만나고 남쪽의 영월군과 서쪽의 평창군, 그리고 북쪽으로 강릉시에 어깨를 걸친다. 사방이 크고 작은 산으로 막히고 골짜기마다 맑은 여울이 흘러 예로부터 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평창 황병산(1,407m)에서 발원하여 횡계를 지나 남하하는 송천이 정선과 강릉의 경계를 이루는 석병산(1,055m) 위쪽 두리봉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굽이치는 임계천과 만나는 곳이 바로 유명한 여량의 아우라지다. 임계천이 아우라지에 닿기 전에 더불어 온 골지천은 강의 하구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서 출발하는 이른바 남한강의 발원지다
.

 
아우라지에서 여울은 아침 햇살과 어우러진 강빛이 더없이 좋다하여 조양강이라 불리면서 오대산에서 내려온 대천을 거느리고 정선읍으로 흘러든다. 정선읍에서 또한 고한 북쪽 삼척과의 경계에서 뻗어온 동대천을 맞아들여 흐르다가 다시 태백의 함백산(1,593m)에서 출발하여 고한과 사북을 지나온 동남천과 만나면 그로부터는 동강이 되어 영월로 흘러간다
.

 
옛글이 한결같이 '토지는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고 적은 정선은 본래부터 먹고 사는 일마저도 아주 고단한 땅이었다. 기껏해야 기장이나 피, , 밀보리 같은 밭작물을 심어 그나마도 적게 거두고 나머지는 강이나 산에서 얻는 짐승들의 가죽이나 약재가 고작이다. 다만 땅 위의 삶터가 그렇게 마뜩치 않은 터라 자연이 땅 속에 보물을 숨겼다가 내어주니 숱한 매장 광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

 
『세종실록지리지』정선군 편에는 '금과 철이 많이 나고 옥과 비슷한 돌고드름이 나며, 벼루를 만드는 푸른 돌이 난다'고 적었다. 실재로 정선 땅의 9할이 광물 채굴권에 속한다고 한다. 탄광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팔도공화국'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잠깐의 좋았던(?) 시절 또한 그렇게 흘러가고 이제 정선에 부는 바람은 자나깨나 오로지 관광이다
.

 
폐광, 그리고 사북, 고한의 운명


 
사북, 고한 사람 열의 아홉은 으레 탄광을 터전으로 밥을 먹고 살았다. 사북은 사음대(舍音垈, 사음은 마름의 한자음)와 북일(北日)이란 옛마을을 뭉뚱그려 생긴 이름이고 고한은 고토일(古土日)과 물한리(沕汗里)를 합쳐 만들었으니 모두 일제 무렵의 흔적이다. 한때 두 곳을 합쳐 6만여 명에 이르던 인구 덕택에 두 곳 모두 읍이 되었지만 이제 남은 인구는 고작 1 7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 검은 빛깔로 뒤덮인 석탄 왕국이 저물어 간 것은 불과 2, 3년 전이었다
.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떠나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남았다. 손에 쥔 것 없이 대처로 떠난 이들의 고난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만 탄광이 문을 닫은 폐광촌에 남은 이들의 살길 또한 막막하기만 했다. 생업이 바닥을 드러내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남은 이들의 몸부림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어딘가 숨어있을 길을 찾아 모두들 두리번거렸지만 끝내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관광!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이 낯선 화두에 사람들이 촉수을 곤두세운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시절이었다
.

 
물 맑고 산 좋은 고을이라면 굳이 소문을 내지 않아도 으레 인파로 몸살을 앓는 게 이즈음 국토의 현실이다. 그러나 정선도 정선 나름, 아우라지나 정선 소금강쯤은 되어야 그런 말이 어울릴 듯 싶고 정선 최남단의 전형적인 광산촌 사북, 고한에선 그것마저도 꿈같은 얘기다. 달리 마땅한 관광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다해도 온통 탄더미로 뒤덮인 흉흉한 폐광촌에 사람 발길 끌어들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원의 비경 414번 지방도로 백두대간은 태백 북쪽의 매봉산(1,303m, 다른 이름은 천의봉이다)에 이르러 슬쩍 방향을 틀면서 함백산을 세우고 다시 태백산을 지나면서 완연하게 서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고한에서 매봉산과 함백산 사이를 타고 넘으면 두문동재고 영월에서 함백산과 태백산 사이를 타고 넘으면 화방재다. 전에는 없더니 화방재 정상에서 만항재를 넘어 고한으로 떨어지는 잘 닦인 지방도로가 있어 넘어보니 참으로 절경이다. 만항재 고갯마루에는 함백산 정상이 부르면 들릴 듯 지척으로 다가서 있었다. 만항재를 넘어 골짜기가 고한에 닿기 전에 만나는 아담한  옛 절이 적멸보궁의 도량 정암사다. 정암사 계곡에는 열목어가 산다. 광산이 한창이던 무렵에도 이 곳은 차고 맑은 물이 더없이 좋던 곳인데 웬일인지 물빛이 예전만 못하다. 정암사에서 오리 남짓 골짜기를 타고 내리면 고한읍에서 두문동재로 오르는 갈래길을 만난다. 이로부터는 골짜기마다 걸린 탄광에서 흘러내린 물이 온통 시커먼 냇물을 이루는 곳인데 탄광들이 문을 닫은 지금은 암회색을 띠고 있다. 갱구에서 나오는 폐수를 정화하기 위해 약품처리를 하는 탓이란다. 지금의 고한에는 오랜 논란 끝에 인근 백운산(1,426m) 기슭으로 결정된 카지노 사업에 대한 이야기만 무성하다. '살다보니 어쩌다가 도박장 따위에 목을 매는 신세'가 되었지만 언감생심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것을 어쩌랴. 아니 그보다도 더욱 절박한 것은 당장 카지노가 밥줄에 보탬을 줄 5년 후까지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마저도 날로 힘겨워지는 지금, 무작정 카지노만 바라보며 다만 2, 3년이라도 견뎌낼 일이 고한 사람들에겐 그저 난감한 지경이다.

  세상 문 닫고 돌아앉은 두문동

 
고한읍에서 20, 다시 두문동재 정상에서 태백까지 30. 두문동재는 그렇게 험준한 50리 길을 38번 국도가 되어 넘는다. 두문동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버려진 탄더미가 그대로 산을 이루고 광부 일가들이 두고 간 빈집들이 초췌한 몰골로 즐비하다. 그래도 누군가의 손길이 탄더미가 쌓인 산비탈마다 애써 나무라도 심은 듯 듬성듬성 자라는 초목들이 반갑고 더러 길가에 손 흔드는 갈꽃들은 그 어느 땅보다도 한결 어여쁘다.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를 들추어보니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 한다. 전설을 따르자면, 회유에 지친 조선의 태조는 끝내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두문동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대성초등학교는 월요일 오전인데도 아이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실마다 가득했던 아이들은 이제 고작 10명뿐이란다. 광부인 듯한 중년의 사내 하나가 벌써부터 벌겋게 낮술이 올라 운동장을 서성이며 아무렇게나 삿대질을 해대고 골짜기에는 시커먼 폐수와 함께 버려진 기계에서 흘러내린 녹물이 벌겋게 고였다. 끼니를 걸렀는지 쓰레기 더미를 뒤집는 동네 강아지들을 쫓으며 한 집을 지나면 대여섯 집은 빈집이다. 아뿔싸, 두문동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삶터가 아니었다.

 
백두대간에서 갈래치는 낙동정맥


 
두문동을 나와 무거운 마음을 들고 두문동재를 오른다. 이곳의 이정표는 물론 지도에도 하나같이 두문동재를 싸리재라 적었다. 그렇지만 싸리재는 재 너머 싸리밭에서 호명골로 넘어가는 또 다른 고개라는 게 태백문화원 김강산(47)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비로소 그 곳의 표지판에는 작은 글씨로 괄호를 치고 두문동재라 적혀 있다.

 두문동재 정상에 서면 절대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중의 하나가 바로 매봉산이다. 매봉산의 한 봉우리(1,145m)에서 바야흐로 백두대간과 갈래치는 낙동정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매봉산 위쪽의 백두대간 일부와 한 줄로 그어 태백산맥이라 잘못 부르는 그 낙동정맥은 이로부터 부산 땅 몰운대까지의 천리 길을 떠나간다. 그 낙동정맥과 내륙으로 지리산까지 내달리는 백두대간이 벌린 품안이 바로 낙동강 수계의 경상도 땅이다.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매봉산의 장관을 바라보며 두문동재를 넘어서면 그로부터는 태백 땅이다. 친절하게도 고갯길 중턱에 널찍한 빈터를 만들어 차를 세우고 살아 꿈틀거리는 큰 산 연봉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아주 급한 길이 아니라면 꼭 한 번쯤 걸음을 멈추어 결코 후회될 바가 없는 곳이다. 그 곳에 앉아 담배 한 대 참이 지나면 백두산에 뻗어내려 국토의 척량을 이루는 장중한 산줄기의 힘이 온몸에 전류처럼 흐른다. 늘 살아 있음으로 또한 힘차게 용솟음치는.

 
끝내 잠 못 이룬 태백의 밤

 그날 저녁, 태백의 한 여관방을 뒹굴면서 나는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 보고 온 그 황량한 두문동 생각이 도무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희망없음이란 또한 무엇이겠는가. 어린 아들딸들이 공부하는 학교 한 쪽에서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는 무기력한 아비들. 병든 지아비와 철없는 자식들을 버리고 대처로 떠난 무정한 어미들. 진폐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몹쓸 병이 되어 두억시니처럼 마을을 뒤덮고 있는 깜깜한 절망.

 새벽 무렵, 까무륵 잠이 들었다가 나는 꿈을 꾸었다. 몇 해 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 베트남 남부의 광활한 벌판이었다. 미군에 의해 무차별 살포된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의 땅. 그 황량한 죽음의 땅에 다시 풀씨가 날고 초목이 새순을 틔워 마침내 지붕보다 높이 자란 열대우림을 보면서 나는 생명에 대한 끝없는 경외와 존경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비록 검고 숨막히는 땅. 틀림없이 저 황폐한, 가도 가도 탄가루뿐인 산천에도 생명의 나무가 다시 자라고 들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날은 꼭 오리니, 서러워 말라 두문동이여! 지난 날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우리들의 시린 등을 덥혀주던 참으로 따듯했던 한 시대의 온돌이여!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7/10월호)

 

 

 

<양산박님의 보내주신 사진>

 

 

 

 

 

 

 

 

 

 

 

<고인돌 형님이 보내주신 사진>

 

 

 

 

 

 

 

사니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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