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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테마산행/관악산(+주변산)

관악산 둘레길(관양동~과천~사당~서울대)

by 사니조은 2018. 12. 17.

 

관악산 둘레길

<관양동~과천~사당~서울대 구간 둘레길>

 

▣ 2018.12.15일(토)

홀로

17.8km/6시간 45분

 

<을지문덕장군,조선 이순신과 함께 3대 영웅으로 대접받는 강감찬장군의 동상>

 

 

 

 

 

 

 

 

산행기>>>>>>>>>>>>>>>>>>>>>>>>>>>>>>>>>>>>>>>>>>>>>>>>>>>>>>>

 

 

 

오늘 관양동~과천~사당~서울대 구간 둘레길을 가 보기로 한다.

오늘로써 관악산둘레길은 끝이다.

 

관양동 산림욕장 입구에서 부터 과천 방향으로 가는 둘레길은 처음 걷는 길이었고

이정표,표지기,표식 등이 갑자기 없어져 당황,둘레길을 놓쳤다가 다시 찾는 과정도 두어번 있었다.

 

어쨌든

계획하지 않았던 둘레길,끝이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나름 재미있는 산행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관악산을 들어가고 나가는 입구와 출구를 알수있었고 가지 않은 미지의 길들이 또 나를 설레게 한다.

 

다만,과천 용마골 입구~남태령~사당역 관음사까지 도로 따라 걸어야 했다.

그리고 관악지맥과 연결되는 관악산의 곳이 궁금했었는데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관양동 시장 근처 막걸리 2통과 만두 몇 개 사 가지고 이곳으로 올라간다.

1통 살려니 미안해서 내일 것 까지 미리 준비해서 2통이다.

 

 

자주 오던 관악산 자연학습장.관양동 능선 올라가는 길.

여기서 부터 관악산 둘레길이다.

여기서 부터 간촌약수터까지 가면 된다.

 

 

 

학습장 앞 화장실이 있고 우측 난간대 중간에 관악산 둘레길 표시판이 있다.

관악산 둘레길에서 만날 수 있는 표식은 이정표,안내판,표지기,,,

표기도 있다가 없어지고,모양/색상도 여러가지.

서울 둘레길과 관악산 둘레길이 겹치는 곳에에 대한 안내도도 없다.

 

 

 

 

 

 

 

 

 

 

 

 

 

 

 

 

 

 

간촌약수터

 

 

 

 

 

 

 

 

 

 

안양과 과천 경계점 근처 안내가 없다.

갑자기 표식이 없어 당황,,,두갈레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둘레길이라 아랫쪽으로 선택해서 내려갔더니

 

 

 

관양동 마을 아파트 쪽으로 내려왔는데,,,

 

 

 

 

성남-안양-인천공항을 이어주는 제2경인고속도로 상단으로 와 버렸다.

이쪽이 원래 둘레길인 것 같은데,,,

삼각산이나 관악산이나 둘레길에 시설물이나 개인 소유 땅이 있어 둘레길 같지 않은 둘레길이 많다.

 

 

 

 

 

 

다시 둘레길을 만나고

 

 

 

 

 

 

 

 

 

 

 

 

 

 

 

 

 

 

 

 

 

 

 

커다란 화살나무

 

 

 

과천종합청사 역에서 6봉으로 접근하는 등산로 입구와 만나고

 

 

 

 

 

 

 

 

세심교

 

 

 

 

 

 

 

따뜻한 곳에서 막걸리 한잔

 

 

 

 

 

 

 

 

 

 

 

 

 

 

 

 

이런 곳도 있었구나

 

 

 

 

 

 

 

 

 

 

 

 

 

 

 

 

 

 

 

 

 

 

 

 

 

 

 

 

 

 

 

과천향교에서 관악산 올라가는 등로와 만나고

 

 

 

 

 

 

또 둘레길 표식이 읎다.좬장,,,그래서 이리저리 방황,,,

여기서 과천향교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둘레길이었다.

이번에 내려가야 하는데 올라왔으니 두번의 찍기에서 완패당했다.

 

 

과천향교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과천향교는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워졌는데, 창건 후 1400년(정종 2)에 소실되어 1407년(태종 7)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불에 타 다시 세웠다가 1690년(숙종 16)에 과천 서이면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44년에는 일제의 1군 1향교 원칙에 따라 시흥향교·안양향교·과천향교를 통합하여 과천향교라고 하였는데, 1959년 시흥향교라고 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과천향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향교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며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면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그 뒤에 있는 내삼문에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양식 건물로 맞배지붕에 풍판(風板)이 있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던 것을 좌우 양쪽으로 1칸씩 증축하였다. 내삼문은 대성전의 문으로 소슬삼문 형태로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향교의 정문 역할을 하는 외삼문은 소슬삼문 형태로 좌우에 1칸씩의 방이 붙어 있다.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이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둘레길 표식이 없어 과천향교로 내려가다 다시 올라와 마당바위 쪽으로 올라간다.

 

 

 

 

 

 

다시 둘레길을 만나고

 

 

 

 

 

 

 

 

 

 

 

 

 

 

 

 

 

어떤 동물의 발일까???

 

 

 

 

 

 

 

 

 

 

 

용마골 능선이라,,,담에 와야 할 코스가 또 생겼다.

 

 

 

 

 



 

 

 

 

 

 

사당에서 과천으로 오가는 도로.

여기서 부터 남태령-사당역 관음사 까지 도로따라 가야 한다.

 

 

용마골 입구

 

 

 

 

 

 

남태령

오늘도 차가 막혀 걸어가는 내가 더 빠르다.ㅎ

 

 

 

관음사,,,여기까지 도로따라 올라왔다.

 

 

관음사를 거치지 않고 그냥 연주대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을 듯한데 빙둘러가게 만들어 놨다.

 

 

 

 

 

 

 

 

 

관음사

 

 

 

 

 

 

 

 

큰 바위안에 연못,,,???

 

 

 

 

 

 

 

 

 

또 관악산 둘레길 포식이 안보여 산으로 기어 올라가니 전망대가 있어 막걸리 한잔하면서,,,

 

 

 

많은 건물들,,,많은 사람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런데도 집이 없다고 어제 남양주,하남,인천 계양에

신도시를 건설한다고 발표가 있었다.

 

 

점점 도시로,,,도시로,,,

 

 

올바른 선택인가?

 

 

 

 

 

 

 

 

 

 

 

 

 

 

 

 

 

 

 

 

 

 

 

 

 

 

 

 

 

 

 

 

 

 

 

기도터???

 

 

 

 

 

 

관악산둘레길은 표식이 이젠 주황색 화살표로,,,

 

 

 

 

 

 

 

 

 

 

 

 

 

 

 

 

 

 

 

 

 

 

 

 

 

 

 

좌측으로 서울대 관련 건물이 보이고

 

 

도로도 보이고

 

 

 

 

 

 

둥근 건물도 보이고,,,

나중에 알고 보니 반대편 산쪽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나중에 반대편으로 산에서 이 둥근 건물과 낙성대가 보인다.

 

 

 

 

 

 

낙성대.강감찬 장군

 

 

안국문,,,안국역??

 

 

강감찬 장군의 동상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에서 태어났다. 금주지역은 조선시대에 금천이라 불린 곳으로 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금천구 일대 등 관악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된다.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지며,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한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다 준 강감찬은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낙향한 뒤에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 등 저술에도 힘써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도로 건너 반대편 쪽으로

 

 

 

 

 

 

 

 

 

 

 

 

 

 

 

 

 

 

 

 

 

 

 

 

 

 

 

 

 

 

 

 

 

 

 

 

여기서 우틀,,,

 

 

 

 

 

 

서울대역과 서울대를 연결하는 도로에서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