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 7차
<만월산터널~금마산~성주산~여우고개~소사고교>
○ 홀로
○
○ 거리/시간 : 7시간 15분
지도는
<주요 지점별 산행거리/시간 >>>>>>>>>>>>>>>>>>>>>>>>>>>>>>>>>>>>>>>>>>>
<산행기 >>>>>>>>>>>>>>>>>>>>>>>>>>>>>>>>>>>>>>>>>>>>>>>>>>>>>>>>>>>>
백운역1번 출구에서 20번 빠스를 타고 오늘의 들머리 입구 근처인
만월산터널로 간다.
백운역에서 10분만에 도착한 버스 정류장(오른쪽 신호등)
만월산 터널를 지나
오늘의 정맥 시작점
sk주유소를 등지면 보이는 진성화학 건물 뒷편으로 가면
이런 산길을 10분 정도 가다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10분 채 못돼 걷다보면
다시 오른쪽 산길로 오라고 표지기가 손짓한다.
개념도 상의 쉼터
날씨가 좋아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간다.
군마산(개념도상에는 철마산이라고 표기된 곳)
정상 치곤 초라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군마산,철마산이 어디냐고 물으면 죄다 모른다고 한다.
여기서 두갈레길이 있었는데 잠시 방황하다 왼쪽 내림길을 선택했는데 가다보니 표지기 몇개가 보인다.
주의해야 할 지점.
여기서 헬기장 인듯한 187봉,,,
여기도 두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이번에 오른쪽 길,,,가파른 내리막,,,몇개의 표지기가 보인다.
지나가야 할 정맥길,,,
정면 앞으로 보이는 산이 소래산(정맥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다)
사진 찍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 이 사진을 보니 어디로 어떻게 지나갔는 지 알 수가 있었다.
오른쪽 앞 산이 정맥길인데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못 가고 우회해서 가야 하는데 길을 못 찾아 1차 알바를 한다.
훈련장도 지나고
군부대 임도도 지나고
14번 송전탑을 지나 도로를 만나면 좌틀하여
도로따라 진행한다.
오른쪽 도로안내판이 잘 보이질 않지만,,,
정맥길은 분명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약 10시 방향이다.
그런데 문제는 맨끝 도로(인천 제2경인고속도로)를 횡단하여야 하는데,,,
일반적인 방법인 (개념도상의 지도 표시대로) 도로 밑을 지날 수 있는 굴다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 가는 길인데
이곳에서 우왕좌왕하다 지금 이사진 약 2시 방향으로 인천제2경인고속도록 따라 내려가다 보면 있는 횡단보도를 이용하여
도로 횡단 후 다시 정맥길로 복귀한다.
답은 알고 있는데 그 방법을 몰라 알바 아닌 알바를 한 셈.
아마도 굴다리가 있는 곳으로 갈려면 교통안내판의 수현마을 방향으로 갔어야 할 듯하다.
알바 주의 구간
제2경인 고속도로라고 표기되어 있는 도로
요 도로를 건너기가 만만치 않다.
지금 요 도로 건너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
우여곡절 속에 도로를 횡단하여 정맥길로 복귀하기 위해 씩씩대며 올라가는 길...
사진 좌측 도로 가장자리로 올라가면 개념도상의 불심정사 표지석을 볼수 있지만 우측길로 가면 불심정사 표지석을 볼 수는 없었다.
어렵게 찾은 정맥 복귀점
이 굴다리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은 박씨농원 식당집이고 왼쪽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길(정맥길),,,
큰 식당 개가 있는데 주인은 안 문다고 하는데 다소 위협적이다.
숲길로 들어서는 표지기가 붙어 있는 나무들이 이번 태풍으로 쓰러져 널부러져 있다.
군부대 출입문에서 좌틀하여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진행
삼각점이 있는 208봉
이 방향표지판도 알바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 계기가 된다.
소래산은 분명 우측 저 멀리 있는데 좌측으로 가라고??
저 앞에 있는 산이 가야 할 성주산.
이 지역의 사람들 조차 성주산,거마산의 위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성주산,거마산 모두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그럴 수 밖에 없다.
지도를 보면 성주산(217)과 거마산(209)이
그 남쪽에 있는 소래산(299)보다 군사적,지리적 우위 위치임을 쉽게 알수있다.
덕분에 또 알바를 하게 된다.
두번째의 알바.약 30분 까먹는다.
묻지 않고 그냥 진행 했으면 알바를 하지 않았을텐데
확인하고 간다고 괜히 성주산이 어디냐 물었다가 괜히 오던 길을 빽,,,
다시 돌아왔다.ㅠㅠ
알바 중에 바라 본 소래산
다시 방향 확인하고,,,아무래도??? 다시 빽.
여기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주산이 어딘가요 물어 보니 여기가 성주산이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마산이었다.
정맥길 위에 있는 전진아파트를 찾은 후 뒤돌아 보며...
왼쪽 계단을로 내려 왔어야 하는데,,,약수터 있는 길로 내려왔다.
전진아파트에 6-2번 버스 종점이 있다.
버스 종점 맞은편,우측 담 끝 부근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정맥길이 우측 군부대 철조망 따라 올라가는 것인 줄 알고 올라 갔더니 초소병이 길이 없단다.
친절하게 내려가 버스 종점 맞은편에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고 알려준다.
알려주지 않았으면 용감하게? 철조망 타고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ㅎ
성주산 정상은 갈 수 없다.
식사할 곳을 찾아 보지만 영 마땅한 곳이 없다.
사람들이 오가고 먼지는 폴폴나고 주변이 너무 어수선하고 지져분하고,,,
그냥 참고 참고,,,,
구름다리가 있는 하우고개
경기도 시흥과 인천시와의 경계 지점인 듯
왼쪽으로 본 인천시가지,,,왼쪽 맨끝 계양산이 보인다.
여기서 알바 주의 지점
약간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꺽여 내려가야 한다.
여기서 계속 올라가면 알바.
표지판을 잘 보고,,,
생태통로가 있는 여우고개는 쉽게 찾을 줄 았았다.
여우에게 홀렸는지,,,
왜 알바를 했는지 몰랐는데 산행기를 쓰는 과정에서 알게 된다.
알바의 원인은 점심 식사엿던 것 같다.
아마도 이길을 계속 따라 가다 보면 왼쪽으로 여우고개 빠지는 길이 있었을 것인데
이 근처 가다가 오른쪽 숲속으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이런 길로 복귀했는데
들어갔던 곳과 나왔던 중간 어딘가에서 여우고개 빠지는 갈림길이 있었던 것 같다.
참 알바를 할려면 이렇게도 하는구나,,,
요기까지는 잘 왔는데...
산행 중에는 이 곳이 여우고개인 줄 알았는데,,,
이때까지는 알바 인 줄도 모르고,,,
소사고교 있는 곳까지는 엉뚱한 길로 돌아돌아 가게 된다.ㅠㅠ
점점 가까워 지는 소래산.
여기오니 이제서야 잘못 왔음을 알게 된다.
그래도 당황스럽거나 혼란스럽지는 않음은 왜일까.
알바의 생활화...ㅎㅎ
오리몰이 중,,,ㅎㅎ
오리는 참 미련하다.
사람이 서 있기만 해도 방향을 튼다.
그러니 오리 몰이는 참 쉽다.
이리 나 왔어야 하는데,,,,
다시 찾은 정맥길
여기서 오늘 마치려다,,,
좀 더 진행하기로 한다.
(왼쪽이 소사고교이고) 앞 도로 철조망에 표지기가 휘 날린다.
그래서 저 철조망 옆구리쪽으로 올라 오른쪽 산길로 해서 민들레 농원까지 진행했는데,,,
나중에 후회한다.
편하게 길 건너 도로 따라 우측으로 따라가다 보면 이조가든과 민들레 농원을 만날 수 있다.
앞 산쪽으로 올라오니 할머니들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
나를 보더니 별 반갑지 않는 눈치이지만 인사를 하니 받아는 주신다.ㅎ
소래산 쪽으로는 해가 지기 시작하고
이조가든.
인천에 근무할 때 이 가든에 와서 갈비 먹어 본 기억이 나는 듯하다.
그 떄의 갈비 맛,참 입에서 살살 녹는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때가 1990년도 초,,,약 20년전 일이다.
지금도 그 맛일까.
이조가든 수돗가에서 씻고 옷갈아 입고,,,
떙~큐
민들레 농원까지 갔다가 다시 소사고교까지 도로따라 와서 소사고교 앞에서 버스타고 소사역으로,,,
<교통편/소요경비 >>>>>>>>>>>>>>>>>>>>>>>>>>>>>>>>>>>>>
갈때: 집/전철 à 백운역/20번버스--> 만월산터널
올때: 소사고교 앞/71버스 à 소사역/전철 à 집
<소요경비> 약 1만원 <교통비 기타 잡비 포함>
<산행 참고 사항 >>>>>>>>>>>>>>>>>>>>>>>>>>>>>>>>>>>>>
○ 전체적으로 볼 때 표지기가 거의 없고 샛길들이 많아
알바 위험이 늘 있어 주의
○ 들머리 : 만월산터널àsk주유소à진성화학à산길à콘크리트 도로à
콘크리트 도로 따라 10분 à 우측 산길 à 개념도 상의 쉼터
à 10분 산길 à 금마산(개념도상에는 철마산으로 되어있음)
○ 금마산에는 왼쪽길과 우측길이 있음 à 왼쪽길이 정맥길(주의)à 좀 내려가다 보면 표지기 있음 (확인 진행)
○ 금마산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187봉에서 왼쪽길과 오른쪽길
à 오른쪽길이 정맥길 à 약간 가파른 내리막길로 내려가다 보면
표지기 보임 (확인 진행)
○ 이후 비루고개까지는 정맥길을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우회길 이용해야함(14번 송전탑à도로 à 좌틀)
○ 도로 따라 진행하다 직각으로 만나는 큰 도로(제2경인고속도로)를 횡단해서 정맥길로 복귀해야 함
- 가장 일반적인 방법 : 개념도 상의 이가백숙,버드나무집à굴다리를 이용해서 횡단
- 인천대공원 앞쪽에 있는 횡단보도를 이용해서 도로 횡단
○ 도로 횡단한 뒤 박씨농원 식당 앞à 숲 à 군부대 콘크리트 포장도로(도로 횡단 후 불심정사 표지석을 지나 계속 도로 따라 올라간 뒤 우측 군부대 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à 이후 군부대 출입문에서 좌틀(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진행à군훈련장
○ 이후 일반 산행 샛길이 많고 표지기도 없어 주의 진행
○ 소사고교가 있는 도로 건너 우틀하여 도로 따라 올라가면 왼쪽으로 이조가든 지나 민들레 농원까지 가는 것이 좋을 듯(굳이 정맥길을 따라 갈려면 도로 앞에 있는 산길을 따라 가야 하는데 별 의미가 없어 보임)
<알고 가기 >>>>>>>>>>>>>>>>>>>>>>>>>>>>>>>>>>>>>>>>>>>>>>>>>>>>>>
성주산 (일명 와우산)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부천의 주산이다. 성주산(聖柱山)이라고 표 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 이며 그 이전에는 와우산 또는 댓골산이라고 불렸 다. 특히 하우고개가 있는 부분은 1918년 발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화오현산이 라 고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은 부천시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시흥시 대야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1917년에 측량한 지도에는 聖主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해발 200미터이다. 성주 산 이라고 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제 때 도서관 심곡분관 자리에 1938년 일왕 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소사면 신사가 세워졌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산 이름이 아닌 가 한다. 성수산은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 한다.
이 산의 형세는, 현재는 시 청사나 멀리 고증건물에서 관찰해야 볼 수 있지만 도 시 화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벌막 쪽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소가 앉 아 있는 형세를 한 눈에 보아 알 수가 있었다. 즉 지금의 상수도 탱크가 있는 고 언저리의 돌출부인 성무정(활터) 쪽 언덕, 즉 서 울신학대학이 있는 뒷편의 돌출부는 마치 소가 앞다리를 굽히고 있는 형상임을 엿볼 수 있고 주봉인 산정상이 소의 엉덩이 부분이 된 형태이며, 여기서 약간 동 쪽에하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잘라 곳은 소의 허리부분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성주산약수 터가 있다. 한편 부천풀장을 찌르듯 돌출된 능선이 바로 소가 엎드려 있을 때 다리를 굽힌 현 상이다.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는 능선 줄기는 소의 꼬리로 보아 소가 누워있는 형 태 이다. 한편 깊은구지 쪽의 성주산은 댓골산으로 불렀다. 이곳의 서쪽에 1960년대까지 암 자가 있었는데 산동네로 불리고 있다.
비루고개(別離峴)
부평의 황굴(日新洞)에서 만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비루고개(別離峴)"라 불러오고 있는데 모든 옛 지도에는 성현(星峴)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 "비루고개"는 예로부터 한양 서울에서 인천도호부로 통하는 유일한 국도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이 고개를 거쳐 인천 문학산 줄기의 "사모지 고개(三呼峴)"를 넘어서 송도의 능허대(凌虛臺) 동쪽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고 중국의 산동반도를 향하여 떠났다고 한다.
사신을 전송하는 가족과 친지들은 서울에서부터 따라와 "비루고개"에서 이별을 나누고 그래도 정을 못 잊어 헤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사모지 고개"까지 따라와서 멀어져 가는 사신에게 크게 세 번을 불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해서 삼호현(三呼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부평의 별리현(別離峴)은 모든 옛 지도를 살펴 봐도 찾을 수 없는 지명인데 다만 「대동여지도」에 성현(星峴)이라고 적혀 있어 눈길을 끌게 한다.
또한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5만분지 1 지형도에는 "성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부천군 부내면 항동리에서 남동면 만수리 새골(鳥谷)로 넘어가는 해발 120m 정도의 얕은 고개로 나와있다. 이곳을 현재의 지도에는 "비루고개"로 표시되어 있으니 별리고개(別離峴)와 통하는 땅이름이고 "별리고개"를 한문으로 표기할 때 배곶이(船串)를 배나무꽃(梨花)으로 했듯이 "별리고개"가 「별고개」로 착각해서 「성현」으로 표기한 것으로 느껴진다.
또, 일설에는 비류(沸流)가 미추홀에 비류국을 세울 때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비류고개」라 한 것이 변하여 "비류고개"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3) 천마산을 철마산이라 하고
서구 가정동(개경주), 심곡동(기피울) 계양구 효성동(새별이) 사이에 걸쳐 있는 높이 226.7m의 산을 「철마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 철마산(鐵馬山)은 서쪽 골짜기에서 용마가 났기 때문에 용마골(龍馬谷)이라 불러왔고, 그 본디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다. 그리고 이 산 중턱의 바위에는 꼭 말발자국처럼 움푹 움푹 패인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이 바위를 마제석(馬蹄石)이라 하고 이 산을 마제봉(馬蹄峰)이라고도 부른다.
「천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산 밑 개경주(가정동) 마을에는 고려말 합천이씨(陜川李氏)가 많이 살고 있었다. 조선조 초기에 명문이던 합천이씨 문중에서 뜻밖에도 장사 아기가 태어났다. 이 장사아기는 태어난 지 불과 한 이래 만에 걸음을 걸었고 이상하게도 양어깨에 날개까지 달려 방안을 날아 다녔다 한다. 이를 본 이기장사의 부모는 후환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이런 장사(壯士)나 이인(異人)이 나면 나라에서 후한을 염려하여 그 집안 일족을 모두 죽여 없앴기 때문에 그 부모는 그것이 두려워 비록 마음이 아팠지만 장사아기를 다듬이돌로 눌러서 죽이게 되었다. 그러자 이 아기장사는 휙 날아서 천장에 붙었다.
그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그 아기장사를 기어코 붙잡아 내려서 다듬이돌로 누르니 아기장사는 숨을 껌벅거리며 한사코 발버둥을 치는데, 이때 뜻밖에도 별안간 용마가 나타나서 그 집주위를 맴돌며 구슬프게 울어댔다. 그러다가 아기장사가 숨이 끊어지자 그 용마도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산을 용마가 있던 산이라서「천마산(天馬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신성시하였다.
이러한「천마산」이 1916년 조선총독부의 세부칙량(稅賦則量) 때 철마산(鐵馬山)으로 도면에 표기하므로써 「천마산」이 「철마산」으로 둔갑된 것이다. 옛 고지도를 보면 이 철마산에 이웃한 추곶산과 원적산은 표기되어 있어도 천마산으로 표기한 것이 없으니 다만 구전되어 온 산이름일 것이다. 이 때 칙량기사는 마을사람들에게 산 이름을 물으니「천마산」이라 한 것을 철마산으로 잘못 듣고 그대로 적어 넣어 오늘의 모든 지도에 철마산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발행한 인천시 도면에 부평구의 산곡·청천동과 서구의 가좌·석남동 사이에 있는 원적산을 철마산으로 표기하고 또, 부평구 일신동과 남동구 만수동 사이에 있는 금마산(錦馬山)을 철마산으로 표기하여 부평지역에 철마산을 3개나 만들어 놓아 이를 구별하기 위해 "북철마산","중철마산","남철마산"이란 산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한참 모두 잘못된 것이다.
투명성으로 믿음을 찾는 IMF시대에 작으나마 내고장의 산이름이 왜곡되어 문화유산이 바르게 전승될 수 없다면 큰 잘못이며 이를 방치한다면 그 산신령의 노여움 또한 클 것이다.
4) 원적산도 철마산이라 했고 원적산(165m)은 남으로는 장고개(場峴)이며 북으로는 안아지고개(九十峴) 사이의 부평구와 서구를 경계한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이 산은 우리나라 산경표에 원적(元積)으로 명시되었는데 원(怨)이 쌓여 원적(怨積)이 변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중종 때 경인운하를 팔 적에 원테이고개의 암벽 때문에 실패하고 북쪽의 안아지고개를 또 파다가 역시 실패하여 그 사이에 있는 산은 원한이 쌓인 고로 「원적」이라했다고 전하는 것은 근거가 없으니 지나친 과장으로 보인다.
1955년경 외래인이 산곡동에 살면서 이 산을 철마산으로 하고 관통도로를 개설하자고 발의했던 것이 훗날「철마산관통도로」가 생겨서 "원적산"이 "철마산"으로 둔갑되고, 따라서「천마로」「철마산터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었다. 이 원적산(元積山,元寂山)은 모든 고서(고지도)에 고려때 부터 실려있는 오래된 산이름인데 뚜렷한 명분도 없이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고종 20년(1883) 박희방 부사 때 축조한 중심성의 「경명문」 문루인 공해루(控海樓)에 현액했던 「부평八경」, 시문속의 계양고성(桂陽孤城), 원적모우(元積暮雨)의 「원적」에 대한 해설까지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인천땅이름학회'
이는 산곡동 주민들이 인천구시내를 가자면 가까운 장고개는 미군44공병대가 자리잡아 통행이 금지되어 안아지고개나 원테이고개로 빙 빙 돌아 다녀야 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1955년경 외지에서 이사 온 산곡동의 某인사가 이 산을 뚫어 인천과의 직통도로를 내면 산곡동은 물론 부평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 자기 나름대로「철마산」이라 하고 관통도로의 개설을 인천시에 건의하여 여론을 환기시켰으니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었다. 이쯤되니 인천시당국은 현지를 수 차 답사하여 그 타당성은 인정되나 원래 높은 산을 뚫어야 하는 난공사라 예산이 허용치 않아 엄두를 못내고 "철마산 관통도로"란 이름만 매년 문서상으로만 오르내리기를 15년 동안을 끌어 오다가 1969년에 이를 착공하게 되어, 그 공사명칭을 온갖 문서에 적어있는 "철마산 관통도로"로 못을 박고 말았다. 내고향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살펴 지명만은 바로 쓰도록 할 것이지 어쩌자고 아기를 낳아 그 아기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남의 장단에 모두 춤만 춘 꼴이 되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 산은 고려 때 문헌에 기록된 원적산(元積山,元寂山 165m)으로 많은 유적과 일화를 간직하고 오늘에 이어져 왔는데 근래에 와서 무성의한 사람의 한마디 말로 철마산으로 둔갑한 꼴이 되었고 따라서 "천마로"니 "철마산관통도로"가 덧붙어 무려 40여 년 간을 불러와서 모두의 머릿 속에 박혀있으니 "원적산"으로 되찾아 부르기를 어렵게 하고 있다. 거기다 요즘은 한술 더 떠 "철마산터널"이 새로 또 생긴다 하니 기왕이면 "원적산터널"로 하고 "철마산관통도로"는 원적고개(元積峴)로「천마로」는「원적로」 또는「산곡로」로 해서 원적산을 되찾아 주어야 원적산신의 노여움이 풀릴 것으로 보인다. 이 산 정상에는 서구청에서 세운 팔각정 현판에 역시 철마정(鐵馬亭)이라 현액(懸額)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생각은 아니하고 철마산, 철마산관통도로, 철마산터널, 철마정 등이 누적되어가는 오류는 점 점 바로잡기가 어렵게 되고 있다. 이 원적산의 동족 작은 봉우리는 원적산의 지봉으로 원래 이름없는 무명의 산인데 청천동 노인들의 가까운 등산로가 되었다. 이 노인들이 모여 등산은 장수의 비결이니 우리 이 산을 장수산(長壽山)으로 이름지어
불러 왔는데 부평구는 몇 해 전에 이곳에 팔각정을 지어 이를
금마산도 철마산이라 했다.
소래산 북쪽 줄기의 부천의 앞 산은 소가 누운 것과 같다 하여 와우산(臥牛山)이라 했는데 왜정 때 이곳 작은 봉우리에 일본사람들이 신사(神社)를 세우고 산이름을 성주산(聖柱山)이라 고쳐 불렀다. 이 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뻗어 와우고개와 하우고개를 이루고 남쪽은 마니골(
이 "거마산" 서쪽줄기는 비루고개(星峴)을 거쳐 금마산(201m)에 이루고, "금마산"의 주맥은 서쪽으로 "주안산"인 만월산에 이어지고, 또 북쪽 줄기는 부개봉을 이루어 서쪽으로 길게 뻗어서 그 남쪽은 「큰골」을 이루어서 고려 때 수도하던 개국사(開國寺)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시립공동묘지」가 되고 있다.
이 "금마산"과 부개봉은 옛 지도에도 없어 이를 찾느라 한참 고생을 했는데 "금마산"은 「국립지리원」발행, 지형도에 나와 있고 또 본현의 대인걸
이 "금마산"을 1994년 인천직할시가 발행한 관할도에 철마산(鐵馬山)으로 표기되어 새로운 "철마산"이 또 생겨 이곳에 "철마산"이 셋이 되어 「남철마산」이란 말이 나오게 까지 되었다. 한 고을에 같은 철마산을 3개씩 방치할 것이 아니라 "북철마산"은 "천마산(天馬山)"으로 고쳐 주고 "중철마산"은 "원적산(元積山)"으로 ,"남철마산"은 "금마산(錦馬山)"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될 것이다.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세조 9년(1463) 왕명으로 집현전 직제학인 "
원통산→주안산→만월산으로 바꾸었다
남동구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187.1m)는 옛 인천부 주안면(朱雁面)에 소재한 주안산(朱雁山)이다. 왜 주안산이라 했는가? 이 산의 흙과 돌이 모두 붉은 빛이라 주(朱)자와 산의 형국이 기러기가 나는 것 같다하여 안(雁)자를 붙이어 주안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861년에 간행된 고산자의「대동여지도」에는 한문 표기에 「雁을 岸」으로 바뀌어「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 주안산을 주산으로 한 지봉이 서해바닷가를 휘돌아 해안에 접하고 있었으니 朱岸山이라 함도 그리 잘못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元積山을 元寂山으로 옛 지도에 표기되었듯이 우리가 불러 온 모든 이름은 우리의 낱말에서 비롯되어 온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니 한자를 논할 필요성은 없다고 본다.
이 만월산은 한일합방 후 인천지방의 지지조사에 의하면 「인천부 주안면 원통산(元通山, 上十井里 東尾)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986년에 발간된「한국지명 총람」에 「원통산-선유산, 간석동과 만수동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87m, 신선이 놀았다고 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옛부터 부평사람들은 주안산으로 부르지 않고
이 산을「원통산」으로 불러 왔으며「원통이 고개」는 원통산에 있는 고개로 지금의 시립묘지 입구인 십정동에서 약사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원테이 고개"라고 불러왔는데, 지금은 그 서쪽에 큰 도로가 뚫리어 이를 "원테이고개"로 모두 부르고 진짜 "원테이고개"는 이름도 빼앗기고 약사사의 벚꽃 상춘객이나 다니는 한적한 소로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원통산을 선유산이라 하여 신선이 놀았다고 하나 산 전체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곳의 옛 仁川郡 주안면(朱雁面)은
이 주안산이 원통산, 선유산 등으로 불러왔는데 이 산 중턱에 위치한 약사사(藥師寺)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東方滿月世界 藥師如來 淨瑠璃國」이라는 불국(佛國)을 건설하여 일체 중생의 질병을 치료할 것을 서원하고 1932년 금강산「유점사」에서 수행하던 한보월(韓普月 : 현주지 陵海스님의 부친)스님과 은사이신 晦明스님께서 득도하여 중생교화처를 찾던 중 우연히 꿈에 현몽하셨던 산 모습과 똑같은 곳을 발견하고 본래 산이름인 주안산, 원통산을 「滿月山」이라 고치고 약사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약사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밑에 옛 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고려말기에 창건한 사찰로 사세번창하여 늘 백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여 백인사(百人寺)라 불러왔으며 이를 주안사(朱雁寺)로 개칭했는데 조선조 성종때 억불숭유정책에 희생의 비운을 맞아 승려는 뿔뿔이 흩어지고 절은 페허가 되어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다. 이 백인사 위의 바위를 「부적바위」라 불러오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 중이 주안산의 정기를 죽이려고 이 바위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부적바위 밑에 주안사 옛 절터가 있고 주안산 서쪽기슭에 향기나는「돌우물」이 있어 이물은 약수로 안질, 종기에 특효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26년(1444)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물맛, 향기, 약효등을 세밀하게 조사했었다고 전한다.
옛 주안사 절터에도 샘물이 있고 지금 약사사 앞의 돌우물은 샘물이 끊어져 페천이 된 것이 있고 간석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샘물은 옛날 용이 올라간 곳이라 용천(龍泉)이라 불러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있다. 어느 것이 옛 돌우물인지 좀 더 연구를 거듭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주안산"을 부평사람들만이 "원통산"으로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옛고지도를 살펴본 즉, 거의 모두가 "원통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영조 36년(1760)에 발간된「여지도서」그 후의「광여도」,「지승」,「해동지도」,「경기지」,「기전읍지」와 근세인 「부평부지도」(1872), 「부평군읍지」(1899)에 모두 원통산(元
通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원래의 산 이름은 원통산(元通山)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부평문화원>
사니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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