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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보/산행정보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여원재

by 사니조은 2008. 9. 9.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여원재 ]

영호남의 관문, 운봉고원의 두 고개

 

남원 가는 길에 빛고을을 먼저 갔다. 거기 살기는 의사로 살되 백두대간에 미쳐 마음 늘 산에 두고 사는 사람 하나 있어 만날 약속은 있었지만, 이왕 빛고을에 왔으 니 새 단장을 했다는 망월동에 들러 어스름까지 거닐다가 밤늦어 남원으로 갔다. 깊은 밤, 잠든 남의 마을 기어드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오히려 아는 이 없는 게 더욱 마음 편한 법. 시절이 시절에 물들어 굳이 나그네보다 붙박이가 더 많은 여관방을 찾아가지 않아도 좋고, 더러는 어쩌다 이 아득한 곳까지 집을 떠나왔는가 걱정하면서 아무 빈터에나 차를 세워 담요 한 장으로 견디는 여름밤도 참 고마워라.

길모퉁이, 밤새 한 잠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길을 가리키던 신호등이 있었다. 어디 에든 길은 있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라고, 고맙게도 화살표까지 꺼내 보이면서 밤새 새우잠의 머리맡을 일깨우던 선지식 같은 신호등이 있었다. 어쩌자고 나의 길은 한 낮에만 빛나고 밤이면 깜깜하여 보이지 않는가. 마침내 어두워도 보이는 길만이 길 이라고 누군가 신호등 아래 쏜살같이 질주하였으니 오오, 이 밤에 나는 또 길을 잃었구나. 길 위에서 길 잃었으니 그 또한 나의 길. 날이 밝으면 그 모든 전조등을 켜고 온통 불붙는 마음으로 지리산에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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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의 여인이 지키는 고개


두고 온 중부에는 장마비가 온다는데 남부의 아침에는 햇살이 곰실거렸다. 장수 길로 10리 남짓, 게서 다시 올곧게 난 들길을 두어 마장 건너면 슬그머니 몸을 틀어 구비치는 고갯길이 바로 전설 속의 여인이 지키는 고개, 여원재(女院峙). 흔한 이야기로는 왜구의 노략질이 한창이던 무렵 고갯마루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다. 비록 저녁마다 사립에 붉은 등 내다 거는 몸일망정 어찌 왜구의 노리개가 되랴고 벼린 칼로 제 가슴을 도려내어 죽었으니 사람들이 고갯마루 길섶 바위에 돋을새김하여 장차 미륵이 되었단다.

여원재 넘어 운봉 들판에 가면 옛 이야기는 그저 황산 싸움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싸움의 주인공이니 조선시대의 옛 글 역시 너나없이 다투어 기록을 남겼는데, 때는 우왕 6(1380) 9월이며 적장의 나이는 겨우 십 오륙 세나 되는 아지발도였다. 태조 가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인 자리는 지금도 붉은빛이 역력하여 피바위라 부르고, 일제 시대에 여지없이 동강나버린 대첩비가 고스란히 화수리 비전 마을에 누워 있다. 신통한 일로, 지금도 운봉 토박이의 열 가운데 아홉은 읍장 이름은 몰라도 아지발도는 다 안다. 거의
아스팔또에 가까운 발음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 왜장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아예 귀에 박힌 탓이다.

소문이 그만하였으니 여원재와 더불어 이야기 하나쯤 남기지 않았을 터인가. 팔량치(八良峙)를 넘어온 아지발도를 향하여 태조가 여원재를 넘을 적에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점쳐 주었단다. 더불어 여원재란 이름도 싸움에 이긴 태조가 지었다 는 것이다. 주막의 젊고 아리따운 주모가 죽어 백발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길 턱 아래 마애여래불이 그 여인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옛길로 한양에서 진주, 통영으로 가던 제 6로가 지나는 길목이었으니 주막에 드는 나그네마다 입에 거품 꽤나 물었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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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재와 팔량치 사이, 운봉 고원


도형으로 말하자면 대충 사다리꼴을 닮았다. 아래 꼭지점의 왼쪽은 남원이며, 오른쪽은 함양이다. 당연히 위 꼭지점의 왼쪽이 여원재라면 오른쪽이 팔량치다. 여원재와 팔량치 사이, 그러니까 사다리꼴 윗변에 들어앉은 고원이 바로 운봉과 인월이다. 생김이 그러하니 여원재 길을 남원에서 오를 적에는 오르막이 버겁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이내 내리막이 없고, 반대로 함양에서 오르는 팔량치 도 다름없다. 크게 보면, 해뜨는 곳과 해지는 곳에 각각 반쪽의 고개가 걸렸으니 여원재와 팔량치를 합쳐야 비로소 한 고개가 완성된다.

여원재에서 팔량치까지는 24번 국도 길로 얼추 40리가 안 되고 운봉과 인월 사이는 20리 남짓하다. 운봉은 본래 신라와 백제의 접경이 되어 때에 따라 주인이 뒤바뀌는 일은 진한과 마한 시절부터 자주 있었다. 연구가들은 602년 백제의 신라 모산성 (아영성, 아막성과 함께 모두 운봉의 옛 이름이다) 공격을 들먹이며 대략 이 무렵을 전후하여 여원재에 국경이 이루어져 있음을 짐작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때 인가는 팔량치를 국경으로 삼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백두대간 동쪽의 운봉땅이 지금처럼 전라도가 되고 영호남이 팔량치에서 갈리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라고 문헌들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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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이야 구름 걸린 지리산 자락이 지어 보낸 이름일 것이 틀림없고, 인월은 황산 싸움에서 날이 어두워지자 태조가 달을 끌어다 밝혀 싸움에 이겼다는 전설을 품은 이름이다.
천석꾼은 디글디글 혔구, 조선 팔도가 다 아는 만석꾼도 있었다는 운봉 들판 구경을 겸하여 운봉현의 형옥(刑獄) 터가 남았다는 유평 마을에 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산은 높고 들은 아득하여 고원이란 말이 더욱 새롭다. 유평 마을 숲 속에 남았다는 형옥 터는 얼마 전에 숲을 없애고 논밭을 일구어 결국 찾지 못하고, 남원이나 함양 보다 무려 20일이나 빨라 7월 중순이면 이미 벼이삭이 팬다는 들판을 가로질러 동구에 장승이 서 있는 서천 마을로 되돌아 나갔다.

목기와 벅수와 동편제의 고을


딱히 그렇게만 꼽으면 이내 서운하여 몇몇이 돌아앉겠지만 운봉하면 다투어 앞에 나서는 것이 목기와 동편 소리, 그리고 운봉 사람들이 흔히 벅수라고 부르는 장승이다. 운봉에 가서 다짜고짜
들머리에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을 물으면 사람들은 참 난감해 한다. 그런 마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말이다. 우선 읍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꼽자면 서천리와 북천리가 있고 여원치에서 작은 동산을 에돌아 오르면 권포리가 있다. 인월면과 아영면에도 여전히 장승이 동문을 지키는 마을은 흔하고 산내면의 민중 도량 실상사 장승은 너무 유명하여 이미 대접받는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

운봉의 장승은 영락없이 평생 흙과 더불어 늙어온 농투산이 차림으로 우스꽝스러운 엄포와 우락부락한 해학이 쪼아낸 건강한 농경 문화의 표본이다. 그 험상함은 깊은 밤중에 홀로 마주 하여도 결코 무섭지 않으며, 더러 잘못이 있더라도 사정을 얘기하면 짐짓 모른 체 헛기침을 던질 듯한 관대함은 절문을 지키는 사천왕과 사뭇 다르다. 보면 볼수록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보다는 손님을 마중 나온 늙은 이장 부부에 더 가깝다. 아무려나 저렇게 돌에 새긴 마음 동구에 세워두고 잠든 마을 사람들의 꿈길 참 편하리. 그만 간다 하니 또 금세 낯빛이 슬퍼 입술 삐죽이는 서천 마을 벙거지 장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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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에서 인월로 10리 길이면 길섶에 황산대첩비를 알리는 푯돌을 만난다. 푯돌이 가리키는 소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전촌 마을이고, 운봉의 골물을 모아 장차 진주 남강으로 흘러가는 여울을 건너면 비전 마을이다. 모두 대첩비을 두고 얻은 이름인 데 비전 마을은 송홍록에서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 소리가 나고 자란 곳이다. 비전 마을의 첫집 바람벽에는 앞산 이름 없는 무덤에서 흘러나온다는
내 소리 받아가라를 현수막에 걸어 소리 마을의 전통을 뽐내고 있었다. 송홍록 일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빨래터의 널돌까지 모두 수난을 당한다는 비전 마을에는 명창 박초월의 생가가 남아 변함없이 소리 찾는 이들이 줄을 선다.

()으로 부르는 고개 이름


이야기의 시작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마한의 왕이 진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에게 지키도록 한 고개는 정령치가 되고, 황장군이 지키던 고개는 황령치가 되었다. 정령치는 남원에서 노고단으로 넘는 포장길이 이미 오래 전에 관광길이 되어 부산하고, 황령치는 다만 달궁 뒷산의
황나드리란 지명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찾는데 아직 분명치는 않다.

달궁 이야기는 다시 살이 붙어 대략 기원을 전후하여 멸망하는 마한의 마지막 왕이 행궁을 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인 무대로 발전한다. 더불어 가깝게는 노고단 아래 성삼재 역시 각각 성이 다른 3명의 장수로부터 이름을 얻고, 멀게는 팔량치마저 8명의 병사가 지켰다는 내력으로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되었다.
달을 끌어다 싸웠다는 전설이야 아무렇거나 달구경이 그만인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 다만 그 활과 달을 말미암아 인월의 이름 내력을 떠올려 보는 것도 크게 흉볼 일은 아닐 터이다.

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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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합민성에서 합미성, 할미성, 성산산성까지 사람마다 제멋대로 부르는 팔량관 산성에 올라보니 과연 함양 땅의 전망이 창창하여 거칠 게 없다. 마한에게는 진한의 땅이었고, 백제에게는 신라의 땅이었던 곳. 잠시 수자리 살던 신라 병사의 눈으로 보니 그리운 고향집이 참 아득하여 창검 대신 사진기와 수첩을 내려놓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산성에 오를 때면 늘 지고 가는 짐 같은 생각이지만 사람이 마소처럼 머리 숙여 밥 먹지 않는 한 이 땅에 싸움 그치는 날은 없으리. 그리하여 사람도 산천도 끝내 싸움으로 사라지리. 아아, 우리는 어찌하여 내 밥도 남의 밥도 그저 꼿꼿이 먹어야 배부른 이상한 짐승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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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처럼, 그리고 흥부처럼


두 돌이 가까운 아들 녀석, 자기가 말 배운 게 얼마나 되었다고 티브이를 보면서
에스이에스를 찾는다. 그게 뭔지도 모를 듯 싶지만 웬걸 다 안다. 내가 우리 아들은 천재야라고 하면 아내는 그저 퉁명스럽게 보통일 뿐이란다. 그애 누 나인 다섯 살 난 딸애는 애비도 잘 모르는 팝송을 흥얼거린다. 놀이방에서 덧돈을 주고 미국산 선생에게 배운 영어 솜씨이니 애비보다 한결 발음이 정확하다. 애비는 종종 그들이 먹는 밥의 절반은 남의 밥인 것이 두렵다.

누구든지 팔량치 고갯마루에 가면 으레 흥부와 놀부, 그 케케묵은 옛이야기를 떠올려야만 한다. 흥부가에,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인데 운봉 함양 두 고을 품에 흥부가 사는지라, 흥부가 어디에 살았는고 하니 팔량치 재 밑에 살았것다, 연재(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여원재는 연재, 팔량치는 팔령이라 부른다)를 넘어 비전을 지나 흥부집에 당도하니로 등장하는 흥부네 집이 바로 그곳인 까닭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더 이상 아무런 삶의 잣대도 되지 못하는 이 시절에, 아끼기는 놀부요, 마음은 흥부 같은 사람을 그리워한다면 분명 촌스러운 대접을 받으리. 그러나, 그래도 변함없는 우리들의 화두는 점점 더 많이 필요한 남의 밥그릇이다.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8월호)

 

예순 사람 모여 넘는 도적고개

예로부터 삼남(三南)이 풍년이면 팔도가 굶주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는 그 삼남을 일러,
김제 벽골제를 경계로 하여 전라도는 호남이요, 제천 의림지를 시작으로 충청도는 호서이며, 새재 남쪽이 되어 경상도는 영남 이라 하였다. 일찍이 삼한 시대로 거슬러 오르는 이 땅의 우수한 농경 문화는 삼남에 저마다 하나씩 이름난 저수지를 가두었으니 벽골제, 의림지와 더불어 밀양의 수산제가 그것이다. 이로부터 삼남에서 거두는 곡식으로 팔도가 사뭇 낙낙하였다.

삼남이 한곳에 모이는 백두대간의 꼭지점은 민주지산의 삼도봉(해발 1172)이다. 삼도봉을 지난 백두대간은 바투 큰산 덕유(해발 1614)를 일으켜 바야흐로 호남과 영남을 아득하게 갈라놓는다. 구태여 덕유(德裕)라 하였겠는가. 큰산을 사이에 두고 김천과 거창, 함양은 경상도요, 무주와 장수는 전라도 땅이니 고을마다 하나같이 덕이 넘쳐흘러 골짜기마다 해맑은 물소리 끊이지 않는 어진 사람들의 땅이다. 덕유평전으로 동엽령을 건너 육십령까지 뻗어내리는 덕유산 마루 백리 길은 내륙을 달리 는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닿기 전에 헌걸차게 팔을 벌려 낙동강과 금강을 나누며 또한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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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長水)가 띄우는 비단 엽서, 금강


무주는 무풍현과 주계현을 모은 이름이다. 비서(秘書)에 이르기를, 무풍은 충청도 연풍과 경상도 풍기와 더불어 사람 살기 으뜸인 삼풍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무주에서 덕유산과 나란히 남쪽으로 내려가는 19번 국도는 호남의 장수와 남원으로 가고, 구천동을 지나 덕유산의 수령(秀嶺, 해발 940)을 넘어 영남의 거창으로 통 하는 37번 국도는 한 동안 절경 덕유의 품속을 헤매다 가는 아름답기로 손꼽는 길이다. 장차 거창과 장수에 닿은 두 길을 서로 이어주며 26번 국도가 넘어오는 고개 가 바로 육십령(六十嶺, 해발 734)이다.

금강은 충남 연기군 합강리 새나루에서 미호천을 맞아들여 공주를 향해 서쪽으로 머리를 돌릴 때까지 천리 길의 절반을 북쪽으로 거슬러 오르는 강이다. 그 발원은 장수 남쪽 남원 길에 걸린 수분령(水分嶺, 해발 530)이다. 수분령은 백두대간의 영취산(해발 1076)에서 서쪽으로 뻗은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과 신무산(해발 897) 사이에 걸렸으니 마땅히 금강과 섬진강을 나누는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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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석의 『한국의 산하』(홍익재, 1990)에는 수분리 골짜기
밥내샘에서 금강이 발원한다 하였다. 밥내는 식천(食川)이다. 더러 밤내라 하여 율천(栗川)이라 하는 이도 있지만 둘레의 생김이 솥이 걸린 형국의 복부혈(伏斧穴)이라 하고 솥택 거리, 주걱날 같은 주변의 지명으로 보아 밥내가 옳을 듯 싶다. 밥내샘에서 흘러내린 골물은 그로부터 장수의 남천을 이루며 장안산과 육십령의 골물을 모으고 덕유산의 물(구량천, 남대천)을 모아 무주를 지나면 충북의 영동에 닿아 지프내 (深川)가 되고 충남의 공주에 닿아 마침내 곰강이 된다.  

금남호남정맥의
무령 고개

장계(長溪)는 장수 북쪽 20리 어름의 작은 면소재지다. 아득한 옛날에는 되레 장수를 거느리던 때도 있었지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내내 장수를 뒤따르던 손바닥 만한 산현(山縣)이었다. 장계를 중심으로 전주, 진안(호남)과 안의, 거창(영남)을 잇는 육십령 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부산하고, 한편으로 대전에서 진주로 뚫리는 고속 국도가 더러 개통되어 이즈음은 오가는 차들이 곱절로 늘었다. 장계 땅은 호남 좌도 농악의 이름 난 상쇠들이 많이 살았고,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이 또한 흔한 곳이었다.

장계에서 덕유산 자락을 바라보면 바투 육십령이다. 모낸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논배미마다 어린 모들이 한껏 자라고, 콩이며 고추 같은 밭곡식도 모두 뿌리를 내렸으니 이제 딱히 바쁜 철은 지나갔다. 다만 덕유산 동쪽에는 가는 곳마다 양파를 거두느라 분주하고, 그리하여 손댈 틈이 없었는지 더러 캐지 못한 마늘밭에는 마늘 잎이 벌써 누렇게 시들었다. 육십령 들머리 월강리와 삼봉리 마을 앞 들판은 쌀금 만 좋다면 벼농사만 지어도 좀체 부러울 게 없겠다 싶을 만큼 널찍하다. 궁벽한 산촌의 들녘마저 이만큼은 넓으니 과연 호남은 호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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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을 바라보며 들판이 끝나는 곳에는 논개의 생가 주촌 마을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은 백두대간의 영취산과 금남호남정맥의 장안산 사이를 타고 무령 고개가 되어 번암면 지지리로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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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낙동강, 그리고 서쪽의 금강과 섬진강을 거느리며 용트림하는 영취산의 기세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고개 이름 무령은 아마도
무룡(舞龍) 고개의 잘못된 쓰임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무룡 고개를 줄여 그저 무령이 되었던지. 온통 논개 이야기만 무성한 주촌 마을에서 무령 고갯마루까지는 번듯한 포장 도로이고, 고갯마루부터는 이내 흙먼지 풀풀 나는 자갈길을 10리나 더 내려가야 장수군의 으뜸 오지 지지리에 닿는다.

호남과 영남 내륙의 오작교


덕유산 마루의 백두대간 가운데 으뜸은 남덕유산(해발 1507)이다.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해발 1614)은 오로지 금강의 물줄기를 거느리며 한 뼘쯤 백두대간을 비켜 앉았다. 남덕유 남쪽으로는 육십령을 향하여 백두대간이 흘러가고, 동쪽으로는 금원산 (해발 1353)을 지나 진주 땅까지 흘러가는 산줄기 하나가 갈래쳐 나간다. 그 산줄기의 남덕유와 금원산 사이에 걸려 거창의 월성 마을과 함양의 신기 마을을 잇는 구절양장의 옛 오솔길이 바로 남령이다. 육십령이 백두대간을 동서로 가로 건너는 고개라면 남령과 무령고개는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 땅에서 백두대간과 나란히 남북으로 걸린 고개이다.

남덕유가 육십령을 향해 바투 다가서며 밀어 올린 봉우리는 할미봉(해발 1026)이다. 할미봉 산허리를 감아오르며 호남과 영남 내륙을 잇는 오작교, 육십령 길은 시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풀기를,
신라적부터 요해지였으니, 행인이 이 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하였다. 신라적부터 요해지라는 말은 육십령 고갯길에 흔하게 걸린 고성(古城)들이 증명한다. 논개 생가 들머리의 오동산성과 할미봉의 육십령성, 그리고 재 너머 서상면에는 방지산성이 아직도 뚜렷한 흔적으로 남았다.

육십령의 이름 내력으로는 고갯길 60구비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고, 경상도를 따르는 육십령 마을의 촌로들은 안의현에서부터 60리 밖의 고개라는 뜻으로도 푼다. 그러나 오래 묵은 옛글이 이미 분명히 새겼으니
60명이 모여 넘는 고개라 는 종래의 내력을 올곧게 믿어도 좋을 듯 싶다. 육십령은 북쪽의 추풍령이나 남쪽의 팔량치처럼 나라에서 관리하던 고개는 아니었지만 가령, 옥구의 소금이 전주를 지나 영남 내륙으로 들어가던 길목이었고 보면 그만한 이야기쯤은 족히 품고도 남음이 있었다. 또한 험준한 고성들은 세상을 등진 산적들의 소굴로는 더없이 맞춤했을 터이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육십령 마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가 육십령에서 만나 헤어진다. 고갯마루 육십령 마을은 옛적부터 경상도를 따랐으니 여전히 소속은 함양의 상남리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넘어 경상도 땅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거기 후미진 산막처럼 없을 듯 걸려 있는 민가 몇 채가 바로 육십령 마을이다. 마을의 대표라도 되는 듯 홀로 길가에 나와 턱 버티고 앉은 육십령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주인 조정자 씨(58)가 붙임새 좋게 먼저 한마디 던진 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라면 한 그릇 먹자고 들어와 부닥친 질문치고는 너무 버거워서 그냥 돌아댕겨유 하며 농을 쳤다.

7
년 전에 이 곳으로 들어왔다는 그녀는 대구서 왔단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녀는 잡지 한 권을 내밀더니, 처음에는 산도깨비 같은 몰골을 하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놀라곤 하였는데 이제는 척 보면 안다고 백두대간 종주대 이야기를 꺼냈다. 필자 역시 대간 종주를 위해 답사를 온 사람으로 여긴 모양이다.
백두대간은 몰라도 종주자는 한눈에 안다고 제목을 붙인 그 글에는, 밖에서 자는 것이 측은해 공짜로 재워주고, 돈 없으면 돈 주고, 배고프면 밥 먹여준다고 그녀의 행적을 적었다. 육십령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그녀에게 옛날 얘기를 들려줄 노인을 물었더니 선뜻 김창열(72) 할아버지를 소개해 주었다.

스물 아홉에 인가 한 채 없는 육십령 산골짜기로 처음 들어왔다는 김창열 할아버지는 육십령 식당 뒷집에 산다. 그는 본래 산아래 서상면이 고향이지만 시절이 전쟁 직후였으니 그저
먹고 살 길 없어 무작정 산중으로 들어온 사람이다. 일제 시대에 닦은 자갈길로 더러 목탄차가 힘겹게 오르내리던 무렵, 고갯마루에 있던 초가 주막 한 채가 마을의 전부였는데 70년대 중반 그 주막이 헐리고 지금의 식당이 생겼단다. 그는 백두대간을 따라 빤히 건너다 보이는 군장동 골짜기에 터를 잡고 살았다. 백두대간 산마루일망정 명색이 덕유의 그늘인지라 나는 물로 겨우 감자와 서속을 거두었다. 저물 무렵이면 호랑이가 내려와 바람벽을 두드리다 가곤 했단다.

육십령 사람들, 덕유산 사람들


김창열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였다. 육십령에서 살아온 풍상의 칠십 평생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단다. 이튿날 다시 찾아간 육십령 식당의 아주머니는 아주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언젠가 군장동 뒷산에 산불이 일었는데 김창열 할아버지가 아들 형제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무렵이었다. 부부가 함께 산불을 끄기 위해 뒷산에 올라간 사이 집에 남겨두었던 두 아들을 그만 불길에 잃고 말았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주책없이 군장동의 옛일을 꼬치꼬치 캐묻던 어제 일을 한탄하였다.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던 할아버지의 눈가에 고였던 물기가 진종일 가슴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어쩔거나. 빗방울이 추적거리는 백두대간을 거슬러 군장동으로 올라갔다. 마을 없어 진 지가 벌써 20년도 더 되었다는 군장동은 지금은 안개꽃 재배단지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를 핑계로 다짜고짜 아무 비닐집이나 뛰어 들었더니 아주머니 서넛이 안개꽃을 꺾고 있다. 부산도 가고 서울도 가는 꽃이라지만 그 놈의 아이엠에프 탓에 어렵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그래도 꽃밭에서 일하는 동안만큼은 그런 저런 근심 다 잊는다며 애써 미소짓는 아낙은 틀림없이 덕유산의 딸이다. 덕유야말로 정녕 넓고 커서 사람의 웬만한 슬픔쯤은 넉넉히 품고 덮지 않던가. 바라 보고 있자니, 마치 서너 살을 못 살고 죽은 어린 것들의 손짓처럼 안개꽃 가녀린 여기 육십령 고갯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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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마을 미륵과 상원암


빗길에 패이고 무너진 남령을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갈 일이 아득하여 덕유산에서 빼재를 넘어오는 37번 국도를 타고 안의로 갔다. 안의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26번 국도를 달려 서상면 소재지를 바라보다가 왠지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여 '극락사지석조여래입상'이 있다는 봉정마을로 들어섰다. 봉정의 미륵은 한 천 년쯤 한가롭게 밭둑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내가 한참을 이래저래 빈정거려도 도무지 대꾸가 없다. 그럴 땐 참으로 난감하다. 진작에 돌덩이와 대화하는 법을 좀 배워둘 걸 하고 후회해 본 들 미륵은 눈 하나 까닥도 않는다. 도리가 없다. 별 수 없이 또 동네 길을 쏘다니며 귀 뚫리고 입 열린 미륵을 찾아보는 수 밖에.

미륵이란 그런 것이다. 논둑 밭둑에 앉아 잠시 일손을 놓고 솔 담배 한 대를 질근 깨물고 있는 이를 만나면 대뜸 그가 미륵이다. 혹시라도 미륵님 전에 멍석을 깔고 볕에 잘 마른 저민 호박이나 고추 따위를 매만지다 가는 할머니를 만나면 냉큼 달려가 미륵의 근황을 물어야만 한다. 어디서 시집오고 자식은 몇이나 두었으며 또 할아버지는 언제 먼저 뒷산으로 갔는지. 행여 나이 들어 시집 장가 안 들고 속태우는 자식일랑은 없는지. 보일러는 연탄을 때는지 기름을 때는지. 그리하여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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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 미륵은 본래 석가의 도반(道伴)이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바탕도 부처보다 훨씬 반듯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열심히 수행하여 먼저 부처를 이루었지만 미륵은 게을러 아직도 성불을 못한 채 수행을 계속하고 있으니 장차 그 미륵은 언제나 이 땅에 오겠는가. 미륵이 오지 않았으니 미륵전의 저 주인공은 또한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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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물어볼까. 그저 일없는 사람처럼 밭둑을 거닐다보니 발길은 어느새 동네 뒤편을 거슬러 오르는 솔숲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 자갈밭길 10리를 내처 거슬러 올랐다. 억센 산골의 경운기라도 좀체 오르기 버겁겠다 싶은 길도 아닌 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마침내 봉정의 돌덩이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거기 좀처럼 소문내고 싶지 않은 암자. 상원암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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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7월호)

 

 

 

 

 

 

 

 

 

 

 

세상의 삶에는 두루 저마다의 길이 있다. 산다는 게 또한 아주 먼길 가는 일이라고 버릇처럼 주억거리면서 오늘도 사람들은 쉴 틈 없이 저마다의 길을 간다. 멀리 떠나도 길이요, 멀리서 돌아와도 길이다. 떠난 사람만이 머물 수 있고 머문 사람만이 떠날 수 있으니 장차는 떠남도 머무름도 모두 길이다. , 마침내 세상에 길 아닌 것이 없으니 천지간의 그 많은 행차들은 도대체 어느 곳에 닿아 쉬는가. 저 하늘 어디에는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어가서 가면 다시 오지 않는 목숨들도 있다 하니 참 부러워라.

지금 또 길 떠나는 이들은 다시 오는가, 아니면 영영 안 오고 마는가? 때때로 거기,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으로 가자. 가서 한 세상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이나 되고, 솔가지 무성한 숲을 헤치는 바람이나 되어 쉬어 가자. 하룻밤쯤 자 고 가자. 본래 온 바 없어 이내 갈 곳 없는 구름처럼. 때때로 그와 같이 와서 그와 같이 가는 바람처럼. 몇 날이 지나가도 헛헛하여 돌아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매양 그 길 어디쯤을 시작이라 하고 내내 그 길 어디쯤을 끝이라 하면서 정녕 우리 지난날 수없이 매듭지은 그 허다한 마디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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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 강변의 천년 옛절 반야사


상주 땅 모동에서 오도치(吾道峙)를 넘어 영동의 황간에 닿기 전에 백화산을 휘돌 아 흐르는 송천에 기대어 앉은 옛 절이 반야사다. 원효의 제자 상원이 창건한 반야 사는 백두대간의 봉황산과 국수봉에서 갈래 친 두 산줄기가 각각 송천에 막혀 이마 를 맞대는 협곡에 자리잡은 천변(川邊) 도량이다. 남한강의 신륵사나 소양강의 청평사가 강언덕에 있으나 물에서 제법 멀고, 포항의 오어사가 비록 물가에 있으나 호반인 것에 견주면, 반야사는 금강의 물줄기 송천의 여울로 바투 바깥 마당을 삼는 절이다. 행여 장마에 큰물이라도 지면 제 아무리 고승이라도 절간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겠다 싶을 만큼 위태롭다.

산천이 두루 위험하니 절집의 아름다움이야 새삼 들먹일 일이 아니다. 수리의 둥지같이 오만한 벼랑 끝의 암자가 때로 그 어질증으로 아름답듯, 강변의 위태로운 옛 절이 어찌 수려한 풍광을 뽐내지 않았으랴. 다만 얼마 전 시멘트로 지은 요사채가 옛집으로 남은 불당 한 채와 천년 묵은 삼층 석탑을 무안하게 하더니, 이제는 대웅전도 새로 짓고 전에는 없던 큼지막한 시비(詩碑) 하나가 산문의 옛 부도 곁에 놓였다. 게다가 시비와 더불어 세운, 시비를 세운 후손의 공덕비가 참으로 볼썽사납다. 조상의 시비를 세우는데 공덕이라니, 어느덧 반야사도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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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寄宿僧房久  절에 와 묵은 지 오랜데
   心無顧草廬  집 생각이 전혀 안 나네
   山光侵座碧  산빛에 물든 자리 푸르고
   竹影入簾疎  대그림자 성글게 발에 어렸다
   靑磵響幽谷  맑은 물소리 골짜기에 그윽하고
   白雲行太虛  푸른 하늘엔 흰구름이 두둥실
   居僧紊已罷  스님은 이미 공부를 끝냈는데
   床沮殘書     읽던 책이 상 위에 남았구나  

시비에 실린 국당 박흥생(1374-1446)의 시 <반야사>. 시비보다 큰 공덕비를 세우는 후손과는 달리 국당의 시는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읽게 만드는 깊이가 있었다. 그의 시집에 발문을 썼다는 서거정이 티끌 먼지를 벗어나 참으로 도가 있고 덕이 있는 시라 했다는데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반야사>의 마지막 구절은, 따슨볕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구태여 꽃밑 글자를 읽어 무엇하리오로 끝나는 만해의 <오세암>을 떠올리게 한다. 공덕비만 아니라면 반야사의 명물이 될 법도 한 시비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황간의 애향비 회도석(回櫂石)

황간(黃澗)은 본래 신라의 소라현이다가 지금의 이름을 경덕왕 때 얻었다. 민주지산 (해발 1242)에서 발원하는 물한계곡의 물과 삼봉산(해발 930)에서 발원하는 고자리의 물이 장교천을 이루며 황간을 지나 달도 쉬어 간다는 명승 월류봉에서 송천에 몸을 싣는다. 그 장교천의 물빛이 누렇다 하여 예로부터 황간이라 하였으니 황계 (黃溪)와 더불어 모두 이미 신라 적 이름이다.

장교천이 반야사를 지나 흘러온 송천과 만나기를 저만치 앞두고 희한한 푯돌이 하나 서 있으니 이름하여 회도석이다. 말 그대로 풀어
뱃머리를 돌리라는 뜻이다. 『영동군지』를 보니 황간 현감 이운영 18세기 무렵에 세우고 글씨는 충주 사람 박시화가 썼다. 여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비석도 그렇거니와 전서 또한 까막눈으로 보아도 아주 잘 쓴 글씨다. 회도석의 사연인즉, 광교천에 배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배가 내처 하류로 흘러가니 황간의 기운을 밖으로 실어내는 꼴이다. 또한 풍수의 눈으로 보면 황간 땅이 이미 떠나가는 배의 형국이라 회도석을 세워 그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회도석은 근처에 버려져 있다가 얼마 전에 제 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흘러가는 산 천의 배를 비석의 주술로 돌린다는 옛이야기도 그럴 듯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너나 없이 대처로 떠난 고향의 젊은이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정성스레 회도석을 복원했다 한다. 덕분인지 한 동안 늘어만 가던 버려진 논밭이 차츰 줄어들고 있단다. 그리 하여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귀향을 두고 황간 사람들은 꼭 시절 탓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먼길 떠나간 이들이여! 부디 뱃머리를 돌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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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국도에 비는 내리고

황간을 떠날 무렵 개였던 빗방울이 다시 듣는다. 추풍령이 나누어 금강에 보태는 골물이 광교천으로 흘러드는 어름의 동산 위에는 조선 태조 무렵에 처음 지었다는 가학루(駕鶴樓)가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 추녀깃을 세웠다. 황간에서 추풍령 고갯마루는 20리 길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골짜기 논밭은 거의 대부분이 포도밭이고, 그 포도밭 틈새로 부르면 들릴 듯 사이좋게 경부선 철길과 고속도로가 국도와 함께 나란히 달린다. 그 모든 부산한 풍경 위로 바야흐로 우거진 녹음이 봄비에 더욱 짙어 사방은 사뭇 깨끗하고 정갈하다.

황간을 떠나 시오리 남짓한 길섶에 자리잡은 사당은 임진왜란 때에 추풍령을 넘어 오는 왜적과 싸우다 죽은 의병장 장지현(1536-1593)을 기리는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추풍령 오룡동에서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4만의 왜군과 싸우다가 2천의 의병과 함께 죽었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 2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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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의 오랑캐꽃을 들여다보다가 사당을 떠나 산모롱이 하나를 돌아서니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추풍령의 명물인 할매 갈비로 점심을 먹고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노래비가 서 있는 고갯마루로 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집 뒤안의 뽕나무가 그 경계이고 텃밭의 두둑이 또한 그 경계이다. 마을은 하나 인데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내륙 한양 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재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 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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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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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경상 우도의 과거길, 괘방령(掛榜嶺)


추풍령 고갯길 남쪽은 지금은 김천시가 된 봉산면이다. 봉산면에서 김천길을 버리고 백두대간과 나란히 서면 길은 외줄기로 천년 옛절 직지사로 간다.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이제는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직지사 길에서 문득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백두대간을 향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로부터 황악산(해발 1111) 발치를 타 고 넘는 고개가 괘방령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듯 사람 발길로 친다면 괘방령은 추풍 령보다도 한결 부산했던 고개이다. ()이란 본래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나 붙는 것이니까.

추풍령은 관로였다.
되도록이면 포도청 앞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인 풍습은 예로부터 이어진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폐습이다. 별 켕길 게 없는 나그네도 으레 관리들이 들끓는 역로를 피해 한가한 샛길을 찾기 마련이다. 늘 구린 게 많아 부러 트집을 잡는다면 털어 먼지 안 날 리 없는 장사꾼들이 그랬고, 구태여 역졸들의 농짓거리가 되기 싫은 천한 백성들이 그랬다. 또 있다. 이름도 하필이면 추풍이라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은 모두 추풍령을 마다하고 한사코 괘방령을 넘었다. 과거길 에 방에 붙는다는 말은 얼마나 반가운가. 사위(taboo)란 본래 갈수록 태산이라 나중에는 인근에 부임하는 관리까지도 관직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추풍령 을 피하고 괘방령을 넘었다.

괘방령은 그렇게 추풍령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고개였다. 지금은 그 괘방령에도 포장길이 뚫렸다. 고갯마루에는 흔히 추풍령의 장지현과 함께 이야기되는 박이룡 장군의 사당이 있고, 더 내려가면 참 아름다운 숲속의 천덕 분교가 있다. 박이룡은 퇴각하는 왜군을 맞아 수 없이 많은 승전보를 남긴 황간 출신의 의병장이다.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할 적에는 추풍령을 넘었지만 퇴각로는 괘방령이었고, 한국전쟁 때에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으로 진격했던 북군의 퇴각로 또한 괘방령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덥고 배부를 적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춥고 배고픈 시절이 오면 문득 생각나는 고개, 괘방령은 그런 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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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6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상주 화령 ]

               중화(中化) 지역, 그 천년의 싸움터

 


지난 겨울에는 눈이 많더니 올봄에는 비가 잦다. 곡우가 가까워지면서 봄비는 청명 한식에 피어 번성했던 꽃잎을 털어내고 땅위의 모든 가지마다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워낸다. 꽃 필 무렵의 산천보다는 아무래도 잎날 무렵의 강산이 좋다. 사람에게도 때로 는 꽃으로 피어 화려했던 날들 잠시 지나가고 온몸에 새잎 돋우어 다시 먼 길로 삶의 행차에 눈뜨는 나이가 있다. 꽃이 진 자리의 추억을 무성한 초록의 잎새가 덮어 햇볕과 뿌리의 섭리를 따라 쉴새없이 더운 숨을 토해낸다. 살아가기 위하여, 생산의 진통과 노역을 일과로 어르면서 무릇 그 시절에 이르러 비로소 한 목숨이 된다.

봄비 속에 길을 떠나 보은으로 갔다. 보은의 신라적 이름은
삼년산(三年山)이다. 고려에는 보령(保齡, 保令)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 태종 6 (1406)의 일이다. 태종은 본래 꿈이 많은 사람이라 권좌에 이르는 동안 쌓인 업장이 산을 이루었다. 한번은 제 손에 죽은 형제들이 사뭇 아른거려 속리산 법주사에 시주하여 천도재를 올렸다. 무렵을 지나면서 보령이 보은으로 바뀌었다. 핑계야 우도의 보령(保寧) 땅과 음이 같다 했지만 어찌 속내에 끼친 바 없었으랴. 세세생생, 형제를 죽 인 죄 어디 가서 씻겠는가. 막막하여 대대로 그 땅에 깃들이는 자 무릇 보은(報恩)하라 했으니 살아 지은 죄의 티끌 하나라도 그렇게 덜고자 했음이다.

속세를 떠나지 못하는 산


보은에서 5리 어름이면 상주 길과 속리산 길이 나뉜다.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나는 산이 아니다. 이름하여 산은 결코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 다만 풍진 사바가 늘 산을 버리고 어름더듬 속세의 경계를 짓는다. 속리산은 항용 속세에 머무는데 정작 속세는 유별하여 자꾸만 속리산을 떠난다. 산문이란 본래 오는 이 가로막지 않고 가는 이 부여잡지 않는 곳. 산이 또한 거기 있기 위하여 오래 전 아주 먼 곳을 떠나오고, 거기 있으되 늘 어디론가 마음 실려가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속세에 머물되 속되지 않고, 속되지 않되 늘 속세에 머무는 산. 그리하여 지금은 헐값에 쓰이는 저 비승 비속(非僧非俗)이라는 말도 알고 보면 흔쾌히 속리산을 닮은 말이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한강의 물과 헤어지니 그 곳이 바로 속리산 천왕봉(1058)이다. 문장대(1033)에서 천왕봉으로 달리는 속리산 연봉의 동쪽은 낙동강이 요, 서쪽 법주사로 흘러내린 골물은 장차 아름다운 달래강이 되어 북쪽을 거슬러 오르다가 충주 탄금대 아래서 남한강에 몸을 섞는다. 천왕봉 남쪽의 골물은 그로부터 보은과 청산을 지나 금강의 대청호로 흘러드니 그 여울(금강)과 달래강(남한강)을 가르는 산줄기가 바로 천왕봉에서 말티 고개를 건너 청주의 산성 고개, 청안의 질마 재, 괴산의 모래재, 음성의 행티 고개를 지나 안성의 칠현산(516)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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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천왕봉은 세 갈래의 큰물(한강, 금강, 낙동강)을 거느리는 산이다. 그런데 이 말을 속리산 문장대로 바꾸면 금세 틀린다. 옛글 역시 모두 이 꼭지점을 속리산 문장대로 기록했던 까닭에 지금도 자주 일어나는 잘못이지만 문장대는 크게 보아 한강과 낙동강을 나누는 백두대간의 봉우리일 뿐이다. 천왕봉을 지난 백두대간은 형제봉 (803)과 봉황산(741)을 지나 다시 큰산 황악(1111)에 닿을 때까지 그저 막무가내로 몸을 낮추어 화령(320)을 만들고 추풍령(200)을 이루며 겨우겨우 그 명맥을 잇는다.
  

논두렁과 밭두렁의 백두대간

소백산맥은 삼국의 발전기에 자연의 요새로 방어선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전초기지였다.(상주시지, 66)

삼국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글이면 흔히 만나는 대목이다. 고쳐 말하자면 옛날의 백두대간은 언제나 자연의 국경이었고, 국경이었으므로 당연히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격전장이었다는 뜻이다. 미루어 보면, 저 용맹스런 고구려로부터 신라를 보호해준 것 역 시 백두대간이었고, 백제와 신라의 충돌을 지리적으로 중재하던 것 또한 백두대간이었다.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천연의 성(). 어쩌다가 애써 넘어가 보아도 후방의 지원이 쉽지 않은 탓에 이내 다시 쫓겨 넘어와야만 했던 것이 바로 그 옛날의 백두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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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의 전통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오늘날의 도계(道界) 또한 변함없이 백두대간을 따라 마루 금을 그었으니 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다만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다 보면 몇 군데 대간과 도계가 어긋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우구치 마을은 강원으로 대간의 도래기재를 넘어갔고,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부석면 남대리는 충북으로 각각 대간의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상주 화령 일대의 무려 6개의 면은 대간을 넘어 깊숙이 충북 땅으로 들어섰으며 전북 남원의 운봉읍을 비롯한 3개의 면은 경남으로 대간의 여원재를 넘어 팔량치에서 도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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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치나 마락리, 남대리는 채 한 마을도 못 되는 산간이니 다만 제쳐놓고, 대규모로 대간의 경계를 침범한 화령과 여원재 일대는 모두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표고가 낮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떤 곳은 논두렁 밭두렁으로 근근히 대간의 명맥을 잇는 곳도 있으니 말 그대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국이다. 백두대간 본연의 임무인 물가름은 여전하여 변함없이 그 논두렁 밭두렁을 경계로 강과 강이 나뉘지만 바야흐로 지리적인 경계로서 지방을 구분짓는 산줄기의 기세는 볼품없이 초라하다. 그 두 곳은 당연히 신라와 백제를 이어주는 오작교인 동시에 치열한 싸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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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속리산 갈림길에서 상주 길로 30리쯤이면 충북과 경북이 도계를 이루는 적암이다. 풍수에서 십 승지의 하나로 꼽는 명당을 품었다는 구병산(876) 아래 그저 평평한 들판 위에서 엉거주춤 도계가 나뉜다. 그로부터 백두대간의 화령까지는 30리 길이다. 속리산 형제봉 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도계는 적암을 지나고 백화산(933)을 휘돌아 추풍령 위쪽 국수봉(684)에 이르러야 다시 백두대간과 만난다.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 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짐작컨대, 오늘날까지 중화 지역이 경상도 땅으로 뿌리를 벋은 것은 아마도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국경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원의 팔량치 일대가 비록 백두대간의 동쪽이지만 전라도 땅으로 굳어진 연유도 비슷한 내력이 숨었을 터이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그 두 곳은 싸움의 결과에 따라 쉴새없이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 두 곳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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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사람이 걷거나 아니면 기껏 말이나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종류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싸움이 있었다. 얼마 전, 문장대 용화 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사건이 그것이다. 용화는 바로 화북면의 마을이니 경상도 땅이지만 백두대간을 넘어 온 탓에 그 물은 달래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 수계이다. 돈벌이는 경상도가 하지만 수질 오염의 대가는 고스란히 충북의 몫이다. 결국 경북 쪽의 개발 포기로 단락을 맺은 이 사건은 지방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 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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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서면사무소가 있는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 達 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화서면 청계 마을에 후백제왕 견훤을 섬기는 산신당이 있다 하여 찾아갔다가 마을 뒷산에 버려진 절터의 부도와 견훤의 대궐터라 부르는 산성을 구경하느라 남은 해가 다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화령 장날인데 다시 봄비가 내렸다. 가뜩이나 시들해져 가는 시골 장터의 행색이 봄비 속에 더욱 초라하다. 기껏 할머니 몇이 봄나물을 펴놓고 앉아 담배를 빼어물고, 영동에서 왔다는 젊은 묘목상은 바야흐로 활짝 핀 옥매화를 바라보며 그저 심심하다. 장터 모퉁이에 소쿠리, , 치룽 같은 목물을 쌓아둔 가게로 가 보니 아예 문을 반쯤만 열었는데 손님은 물론 주인도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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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 장터에서 재성약국을 운영하는 한규정(35)은 나의 동향이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오랜 벗이다. 본래 모두 궁벽한 산골에서 자랐지만 자라서도 대처보다는 끝내 산 읍이 좋아 이 곳에 터를 잡은 지 벌써 칠팔 년은 지났다. 벗이 소개하여 늦은 아침상을 차려준 태봉 식당의 유점순(84) 할머니는 아랫녘 거창이 고향이다. 9살에 중풍을 맞았다는 남편에게 속아 시집왔다는 할머니의 지난 한 평생도 돌아보면 온통 억새풀 일렁이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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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창의 물레 공장을 다니면서 시집의 열 식구 살림을 꾸려내고 한때는 김설매라는 서울 기생의 집에서 침모를 살다가 변두리 어느 방직 회사에도 다녔다. 둘째 아들과 함께 사는 할머니는 요즘 그저 텔레비전만 본다고 했다. 올해에는 서울 막내 아들네에 있던 주민등록을 고향으로 옮겼다. 보성고보를 다니다가 북으로 간 큰아들이 늘그막에 더욱 간절하여, 행여 살았으면 에미를 찾지 않겠냐고 자꾸만 눈주름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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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

유점순 할머니의 이야기에 붙들려 아침 먹기로 들어간 식당을 점심에야 나섰다. 화령 장터를 빠져나오면 이내 화령 고갯길이 시작되지만 본래 한없이 키를 낮춘 고개이니 여느 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마을 길이 끝나는 산모롱이에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즐비하고 고려 초엽의 유물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비석들은 유달리 치열했다는 한국전쟁의 화령 전투가 남긴 흔적이 대부분이고, 몇은 여느 고을마다 흔한 관리들의 행적이다. 여래상은 풍상의 세월을 견디느라 닳고 닳았는데 광배만은 아직도 번듯하다. 다만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로 두른 쇠창살이 불상을 너무 바투 가두어 답답하다. 아마도 이웃 상봉 마을에 있던 여래상을 도둑맞은 뒤에 그리한 모양이다.

화령 고갯마루의 화령정(火嶺亭)은 비록 예스러운 빛은 없으나 고갯길의 내력을 친절히 적어 편액 대신으로 걸었다. 아득하게는 성읍국가 시절부터 삼국의 싸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령에 쌓인 이야기를 알리는데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뒤를 돌아보니 백두대간이 빚어 올린 봉황산이 바투 어여쁘다.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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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산은 구봉()(=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쌓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 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 「산경표」에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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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지역의 산성을 찾아서


화령 길은 휘적휘적 몇 걸음으로 그저 수월하게 넘는 고개이다. 옛길로 상주의 낙서역(洛西驛)에서 화령의 장림역(長林驛)까지는 느린 행보라도 채 한나절 길이 못되는 거리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엄연하여 화령을 넘어야만 비로소 진짜 영남 땅에 닿는다. 꽃피고 잎나는 산빛이 아주 좋아 일삼아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그 야트막한 고개를 경계로 서쪽(화령)은 아직 논물도 안 댔는데 동쪽(낙서)은 벌써 무논질이 한창이다. 신기한 일이다. 머잖아 산천의 수목들도 다투어 본색을 드러내고 들판 가득 어린 곡식들은 뜨거운 대지의 노래를 부르리라. 길 위의 나그네 또한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 묵은 텃밭에 씨앗을 뿌려야 하는 철이다.

화령 장터에서 옛 중모현의 모서와 모동으로 가는 길은 남쪽이다. 그 길로 5리 남짓 한 곳에 있는 봉촌리의 앞재 마을은 곧 전성(前城)이 바뀐 말이다. 화령에서는 물어도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더니 앞재 마을에 와 비로소 산성이 있는 동산을 일러주는 이를 만났다. 산불이라도 입었는지 비루먹은 듯 수목이 뭉텅 빠져나간 동산 마루에 이미 다 허물어진 성터가 있었다. 70년대까지도 건재했다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그 꼴이 됐단다. 옛 이름을 모르니 훗날에 지어 부르기를 그저 화령고성이라 했다. 중부 내륙 지방의 산성이 대부분 그렇듯 화령고성에도 오누이의 성쌓기 전설이 전해온다. 다만 내기에 진 아들이 자결한다는 결말이 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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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재 마을에서 산 구비 하나를 돌아서면 장림역이 있던 율림리다. 산그늘에 여럿이 앉아 못자리 판에 볍씨를 넣고 있는 농부들에게 들으니 장림에 가서 역촌이라 부르면 본토박이 파평 윤씨들이 화를 낸다며 가지 말란다. 말본새가 이미 타성바치의 설움을 여러 번 겪은 눈치라 고향이 어디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저 껄껄 웃고 만다. 꼭 가볼 일도 아닌 터라 그들이 들려준 얘기를 챙겨 들고 모서면을 지나다 보니 도안역(道安 驛)이 있었던 역촌 마을 들머리에는 자랑스레 큰 글씨로 역마루라 써 놓았다. 그렇다고 또한 내려 살펴볼 일도 아니어서 내처 저만치 보이는 백화산을 향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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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산은 백두대간의 봉황산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천택산과 팔음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다. 봉황산에서 발원한 송천이 백화산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면서 아름다운 옛절 반야사를 강가에 세워두고 명승 월류봉을 지나 난계 박연의 사당이 있는 영동의 고당리로 금강에 들어간다. 송천과 백화산이 그림처럼 어우러진 곳에는 아득한 벼랑 끝의 백옥정이 아름답고, 백옥정 아래 송천을 건너 백화산 골짜기를 바라보면 유명한 금돌성(今突城)의 들머리다. 금돌성은 나당의 군대가 백제를 협공할 적에 무열왕이 태자(문무왕)김유신을 거느리고 행궁(行宮)을 삼았던 산성이다. 금돌성에 머물던 무열왕은 사비성의 의자왕이 항복하자 이 곳에서 곧 백제로 달려갔다.
  

백두대간을 대신하는 오도치

금돌성을 오르기로 작정하고 신발끈을 조이는데 앳된 산불 감시원이 길을 막는다. 굳이 산불이 아니라도 가고 오고 얼추 대여섯 시간은 걸린다며 너무 늦었단다. 별 수 없이 백화산 산행을 훗날로 미루고 나오는 길에 황희(1363-1452)의 옥동 서원을 기웃거렸다. 점심을 얻어먹은 소재 노수신의 봉산 서원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위풍이 당당하다. 오죽했으면 대원군이 철폐령을 내렸으랴 싶어 본래 서원 구경을 좋아하지 않는 터이지만, 소재나 방촌이 모두 청렴으로 이름을 남겼다니 한번 둘러 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또한 앞서 만인지상의 음택치고는 궁색하리 만치 단촐한 소재의 무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바도 있었다.

오도치(吾道峙)는 옥동 서원이 있는 수봉리에서 충북의 황간으로 넘는 준령이다. 백두대간의 국수봉에서 학무산과 지장산으로 갈래 친 산줄기가 송천에 가로막혀 마지막으 로 일으켜 세운 헌수봉의 어깨를 타고 넘는다. 지금은 경북 사람들이 수봉리의 이름을 빌어 수봉재란 푯돌을 세웠지만 본래 이름은 오도치다. 황간 지방에서 부르는 문바위 고개는 마루에 있는 문바위를 근거로 하는 옛이름이고, 오도치는 우암 송시열의 전설에서 비롯되었으니 조선 시대의 이름이다. 백두대간을 대신하여 도계를 이룬 오도치를 넘어서면 이제 그로부터의 모든 길은 한 같이 추풍령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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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5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하늘재 ]

               2
천년 전설 속의 옛길, 계립령

비가 그치기로 이틀을 기다리다 못해 그냥 비 내리는 하늘재(630m)로 갔다. 비도 여느 비가 아니라 석 달 열흘을 참았다가 퍼붓는 억수 장마였으니 땅도 안 보이고 하늘도 안 보이는 지경에 이르러 곧 길떠남을 뉘우쳤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필시 무슨 곡절에 겨워 하늘이 제 몸과 마음 마구 쏟아버리는 것이라고, 모른 체 나아가자니 그도 어렵고 돌아서자니 그 또한 막막하여 땅 위의 걱정을 자꾸 하늘 탓으로만 돌렸다. 언제나 그렇게 안 보일 듯 보이고 보일 듯 안 보이는 길 위에 우리가 산다. 어디라서 그 숱한 울분 모두 풀고 그 울음 다 울 수 있으랴 하고서.

종당에는 길이 무슨 소용이랴. 언젠가는 길도 사람을 잃고 헤매는 날 있으리니 도대 체 저 많은 길들은 어느 곳에 이르러 남김없이 득도하는가. 길과 사람이 함께 안 보이는 문경을 지나 거기 이미 머리카락 허옇게 센 옛 고갯길 하나가 생각 밖으로 나와 앉아 비를 맞는 곳으로 갔다. 고개가 더러 오래 묵으면 무섭기도 하지만 때때로 더욱 오래 묵으면 되려 짓궂은 아이처럼 해맑아지는 법. 장대비 속에서도 티없이 맑게 웃고 있는 하늘재여. 고갯마루 숱하게 흘러간 모든 낮과 밤이 다 꿈결만 같아 자꾸 나그네의 옷소매를 파고들며 장난질치는 이 나라 고갯길의 어진 조종(祖宗), 오 하늘재여
!  

조선 도공들의 땅, 문경 관음


문경에서 주흘산(1015)과 운달산(1097)이 벌린 틈을 비집고 대미산(1115)을 향하는 길 은 본래 당포나 갈평같은 오지 마을로 드는 막다른 흙먼지 길이었다. 지금은 더러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을 덮고 이웃 동로면까지 길을 열어 경북과 충북이 서로 넘나드는 백두대간의 벌재(630) 길에도 손길이 닿는다. 벌재 넘어 충북 땅의 내리막은 바투 유명한 단양 팔경의 상선암과 사인암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소문난 유람길이다.

갈평에서 여우목 고개 넘어 동로로 가는 길과 헤어져 포암산(布岩山, 962)을 바라보면 그로부터 시오리 남짓 지난 해 새로 닦았다는 포장길이 번듯하다. 정작 큰길은 볼품 없이 초라한데 관음리 가는 막다른 동네 길은 무슨 영문인지 잘 생긴 도회지 길을 닮았다. 마을에서 들으니 내년이면 남은 하늘재 고갯길을 마저 포장하여 경북 지방의 월악산 구경 길이 열린단다. 그러나 이튿날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전혀 근거없는 소리라고 했다. 2천년 옛길 하늘재마저 마침내 포장의 운명을 당하는 가 싶어 불안했던 마음이 그렇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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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평에서 하늘재까지 시오리 길에 걸린 마을을 한데 모으면 관음리다. 아래부터 황정, 수새골, 꼭두바위, 중점, 관음, 포암 같은 마을들이 차례로 걸려 있다. 황정은 골물 곁 의 정자 이름에서 나오고, 수새골은 본래 황무지이던 곳을 장마에 사태진 황토가 덮어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전설을 지녔다. 꼭두바위는 뒷산 바위에서 얻은 이름인데 이제 마을의 모양은 없고 그저 외지에 온 도예가 몇 집이 산다. 중점은 곧 사기점에 서 온 말이고, 포암은 산이름과 함께 베바위에서 따온 이름인데 본래는 문막(門幕)이 다. 고구려와 신라 적부터 관문을 막아 낮에는 열고 밤이면 닫았다는 내력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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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년 된 관음리 백자 가마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빗줄기가 빼꼼하게 하늘 한 자락을 내놓는 틈에 관음리로 들어 서니 마을 길섶에는 사뭇 도예 가마를 알리는 표지판이 즐비하다. 황정 숲을 지나 오른편으로 대충 서너 개의 도예 가마 표지판이 서 있는 다릿목에서 관음요(觀音窯)를 물어 찾아갔다. 관음요에는 마침 집안에 제사가 있어 가족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 경건한 틈에 맑지 못한 나그네가 불쑥 끼여드는 일이 민망하여 저만치 문밖에 서서 8 대째 도공을 이어왔다는 김영식(30, 관음리 조선요) 씨를 불러냈다.

그는 지난 89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가마를 물려받아 전통 도자기 굽는 일로 젊음을 사르는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관음리에서 7대를 이어온 도공 가문으로 관음요을 운영하는 그의 숙부 역시 소문난 도공이요, 문경에서 영남요를 운영하는 그의 둘째 숙부는 사기장으로 중요무형문화재의 대접을 받는다. 지금도 변함없이 불을 지피는 그의 가마는 5대조인 김영수 도공이 156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 했다. 할아비가 아비에게, 아비가 다시 아들에게 대를 물려온 흙 굽는 기술을 어려서부터 어깨 너머로 배워 익힌 게 전부인 그는 진짜 토종 도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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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업을 잇게 된 내력에는 언뜻 비장한 물기가 묻어 있다. 죽음을 예감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모두 깨어버렸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는 일제에 의한 조선 도자기의 굴절의 시기였다. 조선 도공의 절망. 아버지의 자학은 어쩌면 선조로부터 핏줄을 타고 흘러온 전통 도자기에 대한 처절한 애증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예에 별 뜻이 없었던 그는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듣고 마침 내 생각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것은 변함없이 그의 혈관에 응어리져 신음하는 조선 도예의 넋을 일깨우는 일이었고 또한 조선의 면면한 도공이고자 했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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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아래 날은 저물고


한때는 무려 36개의 가마가 있었다는 하늘재 아래 이제 옛 가마는 김영식 씨의 가마 뿐이다. 아니 전국에 남은 옛 가마로도 거의 유일한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충북대에서 고고미술사를 연구하는 강경숙 교수에게 들으니 아마도 약간의 보수의 흔적이 발견되는 이유로 사적 지정이 보류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가마 이름도 새로 조선요라 짓고 선조의 숨결을 되살려내려는 젊은 도공의 노력이 꼭 결실을 맺기를 빌고 또 빌었다. 며칠 뒤면 다시 가마에 불을 지핀다고 했다. 그때 다시 오면 가마불 앞에서 밤 새 술잔을 나눌 수 있을 거라며 꼭 연락을 하겠단다. 첫 만남이 벌써 아쉬워 자고가라며 소매를 잡는 그의 일가를 두고 아쉽게 조선요를 나섰다.

이름이 벌써 그렇듯 관음리에는 불상이 많다. 또한 하늘재가 이미 2천년을 묵었으니 그 오랜 옛길에 어찌 미륵의 흔적이 없겠는가. 관음 마을 뒤편으로 포암산 발치에 있다는 관음리 절터를 찾기 위해 동네로 들어서는데 머츰했던 비가 다시 물보라를 치며 세차게 쏟아진다. 참말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숫제 동이로 부어도 여간 재바르지 않으면 그렇게 억수로 들이붓지는 못할 터이다. 처마 밑에서 얼굴만 담장 너머로 내밀고 비 구경을 하는 한 초로의 농부에게 미륵 있는 곳을 물으니 30분은 걸어야 한 다며, ‘여 빗속에 걸 워떠케 가하고 핀잔을 준다. 대답 대신 씨익 웃어주고 비옷을 챙기면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 말이 옳다 싶어 그만 마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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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고갯마루는 홀로 비를 맞고 있었다. 이미 너무 늙어 서까래가 다 썩어도 그만, 보꾹에 비가 새도 그만인 은발의 노인처럼, 아니 그런 것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저 혼자 빗속에 웅크리고 앉아 놀고 있었다. 나그네는 비오며 어두워지는 하늘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고갯마루를 내려왔다. 본래 고갯길을 찾아가면 으레 하룻밤쯤 고갯마루에서 잠자는 버릇이 생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인적 끊어진 곳이 무에 쓸모가 있으랴마는 산마루에 뜨는 달이며 별똥이 지는 밤하늘에 실려 잠드는 즐거움은 고갯길 여행의 은밀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속셈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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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鷄立嶺)에서 하늘재까지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로 거슬러 오른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 이사금 3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 이니 죽령 길의 개척보다 2년이 앞선다. 같은 책 권41 「열전」의 김유신 조에 등장하는 이름은 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 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 「열전」의 온달 조에는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로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려 고종 42(1255)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대원령이란 바로 미륵대원에서 시작되는 말이다. 연구가들은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를 대략 10세기로 어림잡고 고려시대의 절 이름을 대원사로 보는 견해에 거의 동의한다. 우리 나라의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 역시 고려시대이니 본래의 절에 원()을 두고 대원, 혹은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늘재 또한 이 무렵에 대원령이란 이름을 얻는다
.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를 기록에 남기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면 비로소 이를 정리하여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거 나속칭 마골산이라 한다는 기록으로 발전한다.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미륵대원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는 일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새재 길이 새로 개척되고 하늘재 길은 점점 그 쓰임새를 잃게 되지만 가령,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여전히 하늘재 길의 역원이 등장하는 반면 유독 대원과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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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에서의 하룻밤


오늘날의 이름으로 정리를 하자면, 미륵사지에서 문경 관음리로 넘는 고개를 하늘재, 수안보로 넘는 고개를 지릅재, 송계 골짜기로 남한강의 황강 나루에 닿는 길을 닷돈재라 부른다. 본래의 계립령이야 그런 자잘한 분별이 없었을 게 분명하고, 고려시대 미륵대원이 생기면서 계립령 고갯길이 나누어진 것으로 본다면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대원령과 마골점이다. 더불어 그런 이름들은 당연히 계립령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한때 발음의 비슷함을 빌미로 계립령(토종 발음은 겨릅재)을 지릅재로 믿었던 것은 그러한 내력의 대물림이다. 오늘날 역시 세 갈래의 고개 이름을 각각 달리 부르고 있지만 딱히 계립령이라 할 경우에는 세 고개를 모두 합쳐야 옳다. 어쨌거나 지릅재는 계립령이 그 뿌리일 터이고, 닷돈재는 옛 주막의 하룻밤 묵는 값이 닷돈인 탓에 생겼다 하나 하룻밤 숙박료치고는 비록 먹거리를 셈한다 해도 너무 비싸다. 오히려 도적이 길을 막고 닷돈씩 동행료를 물었다는 전설이, 어차피 전설이라면 훨씬 그럴 듯하다. 하늘재란 이름은 근처에 사는 시골 노인들의 기억으로 보아 기껏 조선시대 말기 에나 얻은 이름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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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하늘재 고갯마루에서 오솔길을 타고 내리면 금세 미륵사지에 닿는 것을, ‘차량통행금지란 푯말에 막혀 다시 문경을 지나고 이화령을 넘어 미륵사지로 갔다. 이미 날은 어두워 국립공원 매표소 직원마저 퇴근 준비를 하는 무렵이었다. 막 불 을 끄려는 주막에 들어 국밥과 막걸리 한 되를 말끔히 치우고 칠흑을 틈타 미륵사지로 기어들었다. 한뎃잠 자는 일에 이력이 난 뒤부터 언젠가 미륵을 보면서 하룻밤 자 는 게 오래 된 꿍꿍이였다. 그렇다고 텐트까지 칠 수는 없는 터라 그냥 차에서 침낭을 덮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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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세월에 묻힌 북향(北向)의 꿈


사원의 잠은 달고 깊었다. 미륵은 천년을 서 있고 나그네는 하룻밤도 그냥 새지 못해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어찌 부끄러우랴. 천년을 하루같이 편히 누워 쉴 수 없는 미륵이나 단 하룻밤도 한데 서서 지샐 수 없는 나그네나 고단함은 같은 것. 행여 저마다 한 세상 덧없이 흘러가는 소슬한 이야기 한 토막이라도 들려올까 싶어 밤새 꿈길을 열어 두었지만, 우습게도 그 날 미륵사지의 잠은 꿈 한 조각 없이 깜깜했다. 때때로 꿈 없는 잠이 그리운 시절이니 새벽녘 쏟아지는 불벼락에 놀라 눈을 뜬 뒤에도 몸과 마음만은 사뭇 개운하였다.

누구였을까? 누가 저렇게 고단한 마음 돌에 새겨 천년을 넘어오며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가. 고려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신라 사람이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대체 누가 저 아득한 북녘을 향하여 사무친 마음을 꺼내 두었을까. 번갯불이 무섭게 떨어져 내 릴 때마다 이따금 씩 드러나는 미륵을 향해 그렇게 되풀이 물었지만 정작 대답은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에 묻혀 가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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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기록이 없으니 미륵사지의 창건에 관한 전설은 장님이 만지는 코끼리의 생김처럼 들쭉날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덕주사(德周寺)는 월악산 아래 있는데 항간에 전하기를 덕주부인이 절을 세워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야기는 살이 붙어 북행 길에 오른 신라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이 곳에 이르러 각각 미륵리 불상과 덕주사 마애여래불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되었다. 훗날 연구가 거듭되어 미륵사지는 대략 10세기 무렵에, 덕주사 마애여래불은 11세 무렵의 제작으로 추정되자 새롭게 등장한 전설이 왕건의 제작 운운이다. 나라를 통일한 왕건이 장차 백두산과 만주를 염원하는 뜻에서 지금의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추론이다. 거기에는 으레 풍수를 매우 좋아했던 왕건과 천심십도혈(天心十道穴)의 천하명당 미륵리 절터와의 관계가 부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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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 역사 기행의 들목, 송계


날이 밝았지만 천둥 번개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른 새벽 빗속에 절 구경을 하는 맛도 괜찮겠지만 워낙 센 비에 왠지 엄두가 나질 않아 머뭇거리다 가 끼니가 되었다고 또 칭얼대는 위장을 핑계 삼아 송계로 내려갔다. 어제 넘지 못한 하늘재 오솔길을 넘으려면 어차피 송계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의 허락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이른 아침이라 결국 충주호의 월악 나루 휴게소까지 나가 아침을 먹고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에 들러 하늘재를 넘고 싶다니까 여러 직원들의 말이 모두호우경보가 내렸다고 위험하니 다음에 가란다. TV에서는 보은 지방이 물에 잠겼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튼 가는 데까지 가다가 영 안되면 돌아오겠노라고 신분증을 복사해 주고 관리사무소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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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서 시작되는 골짜기는 덕주사를 비롯한 월악산 등산로, 미륵사지로 이어지는 닷돈재 포장길이 나 있어 굳이 여름이 아니어도 늘 인파가 모박이를 하는 곳이다. 시절마다 두루 요긴하게 쓰임새를 보였던 덕주산성이 더러 흔적을 남기고 성 문도 복원되어 번듯한 모양을 갖추었으니 계립령의 역사를 좇는 이들에겐 더없이 소 중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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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돈재를 지나 미륵사지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골물을 건너 산골 마을 골미로 가는 길섶에는사자빈신사지라는 절터가 있다. 이 절터에는 주춧돌에 태평 2(고려 현종 13, 1022)이라는 건립 연대를 오목으로 새겨 보물 94호의 예우를 받는 아주 매력적인 석탑이 하나 서 있다. 탑의 몸돌을 바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는 구례 화엄사의 국보사사자3층석탑을 흉내 낸 듯 닮았다. 다만 화엄사 탑이 3층 석탑이라면 사자빈신사지 석탑은 본래 9층이던 것이 지금은 5층만 남은 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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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여 오, 하늘재여


도대체 멈출 줄 모르는 빗속을 뚫고 하늘재를 오른다. 하늘재 오솔길은 미륵사지 동쪽으로 외딴 3층 석탑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3층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양을 따르는, 미륵사지의 여느 유물과는 달리 제작 연대를 신라 말기까지 올려 잡는 석탑이다. 적어도 지난 천년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계립령을 오르내렸는가를 틀림없이 그 석탑은 알고 있을 것이다.

시작부터가 달구지 하나 겨우 지날 만한 하늘재 오솔길에는 거친 돌부리가 널브러져 길을 막고, 장마에 패이고 무너진 꼴이 여간이 아니었다. 마음을 몽땅 내려놓고 걸어 야 딱 좋은 길을 차까지 끌고 넘으려니 차도 힘에 겹고 사람 마음 또한 자꾸만 출렁거린다. 빗길이라도 좋으니 차를 버리고 좀 걷고 싶어 끝내는 우산을 찾아 쓰고 한참 을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그네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길은 이미 오래 전에 나그네가 잃고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낯익은 오솔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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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문경 새재를 떠난 지 꼭 15개월만에 다시 문경 하늘재로 돌아왔다. 그 동안 백두대간에 걸린 15개의 고개를 연재하였다. 백두대간에는 현재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대략 70여 개의 포장, 비포장 고갯길이 뚫려 있다. 그 중의 몇 군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고갯마루를 넘어가고 넘어왔다. 어차피 짧은 글로는 낱낱이 다 쓸 수 없는 이야기다. 대충 이 정도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 고쳐 먹은 것도 그나마 아주 다행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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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은 우리 나라 고개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가늠하는 잣대이다. 그것은 인문과 자연으로 구획되는 모든 학술분야에 공통으로 관여한다는 말이다. 본래 아주 홀가분한 여행기를 쓰려던 나의 꿈은 백두대간이란 거대한 장벽 앞에 여지없이 부서져 버렸다. 적어도 나라 고갯길의 적자를 자부하는 백두대간의 고개에 대한 나의 예우는 그렇게 버겁기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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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인 부분의 개입이 농후해지면서 점점시인이 쓰는 기행문이라는 본령에서 멀어지는 일이 안타까웠다. 세상에, 어쩌다가 각주를 매다는 기행문을 쓰는 신세가 되다니! 처음부터 백두대간의 고개기행은 새재에서 시작하여 추풍령에서 마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연재를 하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처음의 생각대로라면 옛길을 대표하는 고개에서 오늘날을 대표하는 고개로 돌아오는 여정이 되었겠지만, 결국은 옛길에서 더욱 아득한 옛길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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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연재의 동안에는 꺼내놓을 수 없었던 고갯길 기행에 대한 나의 특별한 귀의심(歸依心)의 반영이다. 결 국 고개란 게 그렇게 지나간 세상과 미래의 세상을 끊임없이 이어 우리의 삶을 둥글 게 한다는 믿음이다. 귀한 지면을 빌려준 월간 『함께 사는 길』에 감사드린다. 더불어 볼품없는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준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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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9월호
)


[
문 경 새 재 ]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다

  
조선시대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한 산경체계(山俓體系)에 의해 나뉜 아홉 개 나랏길의 대명사, 문경새재. 영남대로의 관문이요 육로교통의 요충이었던 그 길이 20세기 내내 풀숲에 묻혀 있다가 유신시대의 복원작업을 통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조선왕조 5백 년의 영화와 삶의 애환이 스며 있는 세 개의 관문을 지나며 군데군데 오롯한 옛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그 시대 사람들의 두런두런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길의 내력이란 딱히 시간의 유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과거와 현재, 또는 미래로 나누는 시간이란 길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무의미한 구분이다. 길은 저 까마득한 지난 시절부터 아주 오랜 훗날까지 언제나 제 스스로 열리고 제 스스로 닫힌다. 사람들은 으레 자기들이 길을 열고 닫는 줄 여기지만 정작 길은 사람들과 별반 상관없이 자유자재하다. 오랜 옛날 목숨 가진 것들이 세상을 오가는 행로로부터 길이 열렸고, 사람 또한 그런 길 위를 지나는 길손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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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대하여 겸허하지 못한 종족은 기어이 멸종한다. 그리하여 길에 대한 심성적인 외경을 지닌 짐승들은 결코 길 위에서 길을 잃는 법이 없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의 섭리로부터 축출당하는 일이다. 어느 때부턴가 사람들이 길을 다만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인식하면서 사람들은 마침내 길을 잃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옛길이란 길들의, 혈통의 전승을 규정하는 말이다. 이듬해 다시 뿌릴 씨앗을 시렁 위에 소중히 얹듯,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가슴에 품는 길의 종자다. 옛길이란 결코 쓰고 버린 잊혀진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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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나랏길 아홉개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아홉 개의 나랏길(국도)이 있었다. 그 첫째는 파주ㆍ평양ㆍ정주를 거쳐 의주로 가는 길이며, 둘째는 철령을 넘어 함흥ㆍ길주ㆍ경흥을 지나 서수라에 이르는 길이며, 셋째는 원주를 지나 대관령을 넘고 삼척ㆍ평해에 이르는 길이며, 넷째는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ㆍ부산에 닿는 길이며, 다섯째는 넷째 길의 문경 유곡역에서 갈라져 상주ㆍ진해로 통영에 이르는 길이며, 여섯째는 공주ㆍ전주ㆍ남원ㆍ진주로 통영에 닿는 길이며, 일곱째는 여섯째의 삼례에서 갈려 정읍ㆍ나주ㆍ해남을 거쳐 제주에 이르는 길이며, 여덟째는 여섯째의 소사에서 갈라져 평택을 지나 보령에 이르는 길이며, 아홉째는 김포를 지나 강화로 가는 길이다.

  
물론 이 모든 길들은 한양에서 출발하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기점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다. 이 밖에도 요즘 말로 지방도로쯤에 해당하는 많은 작은 길들이 다시 이 아홉 개의 큰길을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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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혀 있는 권근(權近, 1352~ 1409)의 말을 빌려 보자. “나라의 길에는 10리에 여(, 초막)가 있고 30리에 숙(宿, 여관)이 있다.” 또는()과 사()의 구분과 상()과 하()의 구분이 엄하였다
.”
나라에서는 국도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역()과 원()을 설치하여 운영했다. 역원은 나라에서 직접 관여하는 곳도 있었고, 지방의 관청에서 관리하거나 곳에 따라서는 민간에 위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용한 두번째 문장에서 보이듯, 이러한 길 위의 편의시설들은 한결같이 나라의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공공시설이 목적이었다. 더불어 한 시대의 체제가 규정하는 양반과 평민의 구분을 엄격히 적용받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

  
아무려나, 정작 길만은 반상을 캐묻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너나없이 아홉 개의 국도를 통하여 조선 팔도를 왕래했다. ()은 으레 역원에서 묵고 먹었으며, ()는 있으면 주막이요 없으면 민가의 남는 구들을 빌려 묵고, 또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었다
.

  
길의 크고 작음을 따지는 일은 길의 눈으로 보면 아주 부질없고 또한 서운한 일이겠으나,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그 길이 연결하는 고을들의 크고 작음에서 연유한다. 가령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을 따지자면 누구나 경부고속도로를 꼽는다. 그것은 그 길이 나라의 제1()와 제2도를 연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나라에서 가장 큰 고개를 따지는 일도 그 길이 넘는 유일한 백두대간의 고개, 즉 추풍령을 꼽는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은 경부고속도로요, 가장 큰 고개는 추풍령이다. 만약 강릉이 부산보다 더 큰 도시라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은 영동고속도로가 될 것이요, 더불어 가장 큰 고개는 영동고속도로가 넘는 유일한 백두대간의 고개 대관령이 될 것이다
.
이와 같은 섭리는 나라 국토 경영의 근간을 올곧게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산경체계(山徑體系, 오늘날의 산맥이론과 구분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지리 인식체계)에 두었던 옛날에는 한결 명징하고 일목요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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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아홉 개의 국도 가운데 제4로와 제5로가 넘어가는 문경새잿길이 가장 큰 길로 대접받았다. 아홉 개의 국도 중 그 어느 길이 중요하지 않았을까마는 딱히 그 길이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은 것은, 다시 말해 그 길이 경유하는 경상도의 여러 고을과 그 백성들의 숫자에 힘입은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통행량이다. 게다가 그 길의 배후에는 우리 나라와는 도무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나라 일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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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신사(信使) 행렬이 얼추 1천 명이나 되므로 이들이 모두 같은 역참을 경유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좌로(左路, 죽령)와 우로(右路, 추풍령)로 분산시켜 통행하게 하자는 영의정 김재로(1682~1759)의 제안이다. 그리하여 정사(正使)는 중로(中路) 즉 문경새재로 돌아오고, 부사는 좌로, 종사관은 우로로 분산하여 귀국시키자고 부연한다. 문경새재의 통행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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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문경새재를 이용하는 발걸음이 어찌 이뿐이었겠는가. 문경새재는 그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육로교통의 요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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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나라 고갯길의 대명사


  
먼저 간단한 문제부터 하나 풀어 보자.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길이었던 제4로 가운데 다시 가장 중요한 요충으로 문경새재를 꼽았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4로의 곳곳에는 문경새재보다 더 험하고 한결 지나가기 어려운 지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 조선을 먹겠다고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이 유독 문경새재에만 온갖 촉각을 곤두세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백두대간의 고개이기 때문에가 그 정답이다.

  
이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강물을 거슬러 오는 것이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므로, 가령 문경새재 고갯마루에 내린 빗방울이 서로 갈라져 한 줄기는 낙동강이 되어 부산으로 가고, 또 한 줄기는 한강이 되어 한양으로 흘러가는 것을 거꾸로 추적해 올라온다면, 문경새재가 한양과 부산의 가장 높은 정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만약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제4로 곳곳에 문경새재보다 높고 험한 산과 고개가 수백 개라 하더라도, 문경새재의 빗물?서로 나뉘어 각각 한양과 부산으로 흘러간다는 조건이 있는 한, 한양과 부산의 관문은 오로지 문경새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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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경의 원리다. 산경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조선시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시설을 철령이나 대관령, 그리고 문경새재처럼 한결같이 백두대간에 설치한 까닭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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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제4로 하면 딱히 문경새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문경새재는 아예 그곳을 경유하는 제4로의 대명사가 되었다. ‘새잿길하면 다만 새재를 넘는 그 고갯길만이 아니라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제4로 전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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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진도아리랑>의 한 대목,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다역시 그렇게 탄생했다. 평생 그 고개를 구경 한 번 해 보지 못한 진도 사람들에게도 고개 하면 으레 문경새재를 떠올릴 만큼 새재의 상징성은 컸다. 고쳐 말하자면 한 발 더 나아가 제4로뿐만 아니라 조선 팔도 고갯길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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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백년의 영화가 서린 길


  
연구가들은 새재의 개척 연대를 대략 조선시대 초기로 잡는다. 그 이전까지는 지금의 문경 관음리와 충주의 미륵리를 연결하는 하늘재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하늘재는 삼국시대 초기, 정확히는 신라 아달라왕 3(156)에 개척되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고개 계립령(鷄立嶺)의 요즘 이름이다. 새잿길을 새로 낸 까닭은 아마도 계립령이 문경에서 동쪽으로 일정 정도 우회하며 충주로 넘어가는 탓이 아닌가 싶다.

  
새재의 이름에 대하여 세간에 나도는 이야기는 무수하다. 가령 새들도 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라거나, 억새가 많이 우거진 고개, 또는 서울로 가는 제일 빠른 샛길이라는 뜻으로 새재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명칭의 유래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계립령, 즉 하늘재 길을 두고 새로 닦은 고개이므로 새재라 했을 가능성에 제일 비중을 두는 편이며, 혹은 계립령과 이유릿재(현재의 이화령) 사이에 놓였으므로 새재라 불렀을 가능성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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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 문경현 편에초점(草岾)’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은현에서 서쪽으로 19리 떨어진 충주 통로에 있는데 험로가 7리에 이른다고 적었다. 새재에 지금과 같은 관문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 10월 무렵이다.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이 성을 쌓아 길을 막고 지나는 왜군을 기습했는데, 이것이 설관의 시작이라 했다. 때는 선조 27년이니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미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용장 신립(1546~1952)을 죽인 지 2년이 지난 다음이다. 지금처럼 세 곳의 관문이 모두 모습을 갖춘 것은 숙종 34(1708)의 일이다
.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새재가 누린 영화는 일제 강점기에 이화령으로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막을 내렸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척諭沮測?계립령, 조선시대는 새재, 일제부터는 이화령으로 고갯길이 변천한 것이다. 그러나 한양과 서울을 잇는 가장 큰 길의 역할은 문명의 시대가 되면서 이화령이 아닌 추풍령으로 옮겨 갔다고 해야 정확하다
.

   20
세기 내내 풀숲에 묻혀 있던 새재 오솔길은 유신시대에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하여 지금과 같은 형태의 도로작업이 황급히 이루어졌다고 촌로들은 증언한다. 지금의 새재는문경새재 도립공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소문난 관광지가 되었으니, 한때 나라의 제1 고개로서 누리던 옛 영화를 어느 정도 되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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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이 남긴 새재의 보물들


  
문경새재에 남은 옛길의 흔적 가운데 단연 첫손에 꼽히는 유물은 세 개의 관문이다. 관문이란 단어의 사전 풀이는국경이나 요새의 성문이다. 중국 책 『삼국지』에는 관우가 유비의 가족을 빼내어 첩첩의 관문을 필마로 탈출하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그처럼 너른 땅덩어리가 못 되는 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한양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한, 앞서 언급한 철령관이나 대관 그리고 조령관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비록 복원이기는 하나 여태 성문이 존재하는 곳은 새재가 유일하다. 관문이 세 개인 까닭은 1관문에서 3관문까지 둥그렇게 자연지형과 인공의 성곽을 둘러친 포곡식 산성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새재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유지는 두 곳의 원() 터다. 1관문과 2관문 사이의 조령원은 아직도 그 주추며 돌담이 온전히 남아 있고, 3관문 아래 동화원은 그 터만 남았다. 1관문 옆에 자리잡은 새재 서낭당은 지천 최명길(1586~1647)과의 일화를 남긴 처녀 서낭신으로 유명하고, 3관문 옆에 있는 새재 산신당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약수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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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옛것은 아니나 그래도 옛길의 정취를 감안하여 길섶에 복원한 주막이 있으며, 옛날 그 어느 시절엔가 세운산불됴심비석에는 그 길의 연륜이 함께 서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군데군데 더러 남아 있는 옛 오솔길을 걷는 재미는 여느 구경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재만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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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에 하나만 더 꼽자면,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린 최후의 새재 마을상푸실이다. 상푸실은 얼마 전 막을 내린 모 방송국 사극의 무대로 만들어진 모형건물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1관문과 조령원 사이에 있던 상푸실은 새재가 공원이 되면서 하나씩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언감생심 조령원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막에 들 형편마저 못 되는 사람들이 남는 구들이나 헛간을 얻어 하룻밤씩 묵어 가곤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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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무대건물의 들목 삼거리에는 불과 대여섯 해 전까지만 해도 차마 그 마을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던 마지막 새재 사람이 살았다. 그는 바로 집 맞은편에 있던 옛 주막을 기억하는, 주막 옆의 한약방 집 손자였다. 최후까지 완강히 버티던 그가 마침내 상푸실을 떠나면서 5백 년 새잿길의 전승은 끊어졌다. 상푸실이 이 땅에서 사라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을 생각했다. 인간의 길인 새재는 비록 문을 닫았으나, 자연의 길인 새재는 변함없이 우리 가슴속에 뚜렷한 옛길의 종자 하나가 되어 남아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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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돈 글 『문화와나 - 2002. 1. 2 -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죽령 ]

               비와 바람과 장승과 주막이 있는 풍경  

영주시 풍기읍. 산읍(山邑)에 비가 내렸다. 벌써 사 나흘 전부터 온다고 설쳐대던 장마가 기어이 서막을 여는 모양이었다. 4백 리 한양길 죽령(해발 689m) 너머 기쁨의 도량 희방사와 인삼과 천하승지(天下勝地) 금계동을 품은 경상도의 첫 고을. 그리 번화하달 것도 없는 읍내 길을 물어 풍기 읍사무소에 들러 새로 펴냈다는 풍기읍지를 훑어보고 나오다가 문득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말이 생각나서 읍사무소 건너편 유림회관을 찾아갔다. 마침 소임을 맡은 서정학(77ㆍ 풍기향교 전교) 옹은 서울로 출타 중이고 평소에도 으레 그렇게 경로당을 삼는지 노인 서너 분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죽령에 관한 걸 물었지만 들은 이야기는 모두 풍기읍지에서 대충 읽은 것들이다. 전화번호를 적어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죽령의 관문시설이 있던 자리를 물어보니 역시 아는 이가 없었다.

  2천년 역사 속의 옛길

풍기읍을 벗어나면 바투 소백산(해발 1440m)이다.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 하여 넙죽 절하고 갔다는 바로 그 소백산. 백두대간이 태백산 어름에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이다.

일찍이 영남 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그 소백산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 길을 열었다. 신라 아달라왕 5(158)에 죽죽(642년 대야성에서 백제의 윤충에 게 죽은 죽죽과는 동명이인)이 처음 고갯길을 닦은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길노릇에 여념이 없으니 고개 나이 무려 18백 살이 넘었다. 죽령은 한때 백제의 손길이 닿기도 했다 하고, 한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땅이었다가 종당에는 진흥왕의 영토가 된 삼국 결사쟁패의 접경이었다. 또한 죽령과 조령 이남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고향이었으니 거기 가서 견훤의 흉을 보다가는 찬물 한 사발도 못 얻어 마신다. 고려시대를 지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1382)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고려사』 에 남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로는 인조대의 청백리 김시양(金時讓ㆍ 1581~1643)이 지은 『하담파적록』에 실린 다음의 대목이 그 중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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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위 신익성(申翊聖)은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어 문장으로 자허(自許)하였다. 신미년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상촌집』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 속의 『동정록』에,
임진년에 적이 조령, 죽령 두 재로부터 올라왔다.고 하였다. (중략) 내가 동양위에게 말하기를, 임진 년에 왜적이 조령과 추풍령을 거쳐 올라왔고, 죽령만은 적의 발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 일이 없었는데 『동정록』에는 죽령으로 올라왔다고 말하였으며, (중략) 하였더니 동양위는 얼굴빛이 변하여 돌아갔다. (『대동야승』 제72)

  희방사와 불경언해서 『월인석보

풍기에서 죽령이 시작되는 곳은 수철리(水鐵里). 4.5km에 이르는 죽령 터널을 빠져 나온 중앙선이 희방사역에 닿아 잠시 벅찬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는 곳이기도 하다. 수철리의 마을 이름 또한 희방사 연기설화에서 묻어 나왔다.

신라 선덕여왕 12(643)에 두운(杜雲)이란 스님이 살았다. 하루는 두운이 소백산 호랑이의 목구멍에 걸린 비녀를 뽑아주자 호랑이는 그 보답으로 젊고 아리따운 처녀 하나를 물어왔다. 처녀는 서라벌 계림호장 유석(兪碩)의 딸이었다. 출가승의 몸이라 처녀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은 두운이 유석에게 딸을 돌려보내자 유석은 두운을 위하여 절을 짓고 기쁨을 얻은 자리라 하여 희방사라 했다. 또한 산문 밖에 무쇠다리를 놓았으나 훗날 다리는 없어지고 수철리란 이름만 남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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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역 부근에는 중앙고속도로 터널을 뚫는 공사가 한창이다. 첨단 시대의 토목 공사란 게 으레 산천은 안중에도 없는지 온통 소백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 차마 목불인견이다. 소백산 깊은 골짜기 아름다운 희방사역은 이제 그 면목을 말끔히 잃었다. 마을로 내려서 볼까 하다가 왠지 슬픈 마음이 일어 그만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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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비에 이미 큰물이 지났는지 죽령 구비마다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10리 남짓한 산구비를 하염없이 돌다 보면 희방계곡과 죽령길이 나뉘는 희방사 들머리에 닿는다. 희방사는 또한 『월인석보』로 유명한 절이다. 『월인석보』는 『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삼고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보태 세조 5(1459) 에 간행한, 훈민정음 이후 첫 불경언해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방사판 『월인 석보』는 한국전쟁 무렵 미군에 의해 절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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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지령(竹旨嶺)의 「모죽지랑가

풍기 유림회관의 노인들은 한결같이 옛날 죽령에 김유신과 죽지랑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풍기읍지 역시 죽령에 죽지랑의 시비(詩 碑)를 세웠다고 적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도 좀체 아는 이가 없었다. 죽령 고갯마루와 아래 수철리를 두 번이나 오르내리면서 겨우 희방사 들머리에 있는 「모죽지랑가」 시비를 찾았다. 찾고 보니 뜻밖에도 여태 오르내리던 길섶 언 덕이었다. 안내판도 없고 또한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주민들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죽지는 진덕여왕 대의 재상 술종(述宗)의 아들이다. 술종이 삭주(지금의 춘천)의 도독사로 부임하는 길에 죽령( 삼국유사에는 죽지령이다.)에서 한 거사(居士, 이 거사가 해동 고승 원측법사라는 설도 있다)를 만나 서로 정겹게 사귀고 헤어진 후, 삭주에서 꿈을 꾸었다. 죽령의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이었으니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술종이 죽령에 사람을 보내 알아본 즉 거사가 죽은 날이 바로 꿈을 꾼 날이었다. 이에 술종은 거사가 자기 집에 환생하였음을 굳게 믿었다.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 이름을 죽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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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후세에 남겼다. 득오가 문관인 익선(益宣)에게 징발되어 고생할 적에 상관이었던 죽지를 그리며 지은 노래라 한다. 필자는 학교에서 공부할 적에 이 향가를 추모가라고 배웠는데 새로 책을 뒤적여보니 대부분 죽지 생전에 지은 향가라고 적혀 있다. 풍기 사람들 역시 죽지가 살아 있을 적에 이 고장 여인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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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봄이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아담한 얼굴에
  주름살 지는 것을
  잠시 사이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비안개 속의 장승, 그리고 주막

옛날부터 죽령길은 오르막 30, 내리막 30리라 했다. 산길 60리는 잰 걸음으로 군일없이 걸어도 하룻길이다. 풍기에서 점심을 먹고 떠난 길이기도 했지만 길을 찾느라 시간을 많이 버린 탓에 고갯마루에 닿으니 이미 땅거미가 내렸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안개 속에 다들 어디로 갔는지 산 아래 두고 온 마을도 통 보이질 않는다. 여태 온 길도 갈 길도 그 저 묘연하기만 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비 오는 죽령 고갯마루.

죽령 고갯마루는 충북과 경북이 서로 손 흔들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곳이다. 문득 지난 일인 듯 홀연 산안개 걷히는 곳에 나무 장승 한 무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샛길로 올라 금세 10여 기의 장승들이 버티고 선 마루턱에 닿았다.
소백대장부소백여장부 한 쌍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가운데 터를 잡고, 좌 우로 크고 작은 장승들이 고갯마루 오가는 행인들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다. 성 난 듯, 울부짖는 듯, 기어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러면서도 슬쩍 웃음을 참는 장승 특유의 짓궂은 표정이 사뭇 싱그럽다. 소백대장부는 경북에서, 소백여장부는 충북에서 올라와 죽령 장승 부부가 되었단다.

장승에서 서너 행보 떨어진 곳에 일찌감치 사립에 붉은 등 내다 밝힌 초가 주막 한 채가 있었다. 이름하여 죽령 주막. 쪽빛 모시치마에 흰 저고리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중년의 주모가 주살나게 문턱을 넘는다. 날은 저물고 그저 한 잔(?) 생각이 똥줄을 태웠지만 시절이 또한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 이빨을 악다물고 단양으로 핸들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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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주막집 채묵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안정자(43ㆍ 경북 영주) 씨는 영주서 횟집을 하다가 얼마 전 주막을 넘겨받았다고 했다. 물 좋고 바람 좋고 손님 좋은 것은 물론이고 벌이도 까짓 횟집에 댈 게 아니란다. 딸이 둘인데 하나는 중국에 공부하러 가고 하나는 대학엘 다닌다고 자랑이다. 팔자 좋아 산천 구경이나 다니는 사람하고 사진 한 장 찍자니까 금세 몸이 안 좋아 벗어두었다는 쪽빛 모시치마 를 차려입고 사립문에 선다. 벌써 그녀는 죽령의 냄새를 몸에 담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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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가 된 석굴사원 보국사지

채묵밥에 싸비스로 막걸리 한 사발 얻어 마셨으니 부러울 게 없다. 고갯마루에서 단양으로 떨어지는 30리 내리막길에는 골골마다 아직도 옛이야기처럼 주절주절 마을이 들어앉아 사람들이 산다. 샛골, 무시치, 매바우, 구렁말, 음지말 같은 그 이름마저 곰살가운 죽령의 터줏대감들. 옛길은 숲되고 숲은 새길 되고 또다시 새길이 옛길로 변하는 동안, 아직 거기 사는 이들 속내 변치 않아 오래 묵은 옛 마음 더러 남았으리.

고갯마루 아래 첫 마을은 샛골이다. 깊은 골짜기에 그저 없을 듯 없을 듯 걸려 있는 그림 같은 산촌이다. 대충 둘러보아 열 집은 넘고 스무 집이 채 안 된다. 논배미는 아예 찾는 일이 어리석은 듯싶고 밭도 하나같이 산비탈 화전 따비밭뿐이다. 마당에 소복이 가꾼 모종을 돌보는 한 노인에게 물으니 참두릅, 개량 머루, 사과 같은 고랭지 재배가 주업이란다. 본래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곳이지만 마땅히 농사 지을 땅이 없으니 그럴 것이었다. 요즘처럼 꽃 좋은 철에는 수입이 괜찮은 벌을 치는 이도 더러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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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골에는 케케묵은 절터가 하나 있다. 언젠가 죽령에도 중원 미륵사지처럼 거대한 석굴사원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무릎을 덮는 잡풀을 헤치고 골짜기를 거슬러 올랐다. 보국사지는 황량했다. 더러는 밭으로 쓰다가 오래 묵었고 더러는 수목에 묻혀 흔적을 잃었다. 다만 족히 두 길은 넘을 듯한 석불 입상 한 구가 외롭게 절터를 지키고 서 있는데 그나마도 머리가 떨어져나간 흉측한 몰골이다. 석불의 머리를 찾기 위해 온 산을 다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다. 수없이 쇠망치를 맞은 듯한 발등의 상처로 보아 누군가 부러 몹쓸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짐작컨대, 아마도 전쟁의 짓이리라. , 이 땅의 미륵은 언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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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랏님이 모시던 죽령 산신당

샛골에서 10리 남짓한 아랫말은 매바우(鷹岩) 마을이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아예 그런 마을 이름들을 뭉뚱그려 용부원리(用富院里:조선시대 용부원이 있었다)라 부르지만 아무려나 동네 사람들은 그래도 토종 옛 이름이 좋다. 매바우에 들러 산신당 얘기로 말문을 열자 모두들 김성락(79ㆍ농업) 옹을 가리킨 다. 김성락 옹은 죽령 산신제의 집사일을 맡은 지 어언 30년이 넘은 사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는지 마당 한켠에서 고추를 다듬던 옹의 부인이 에 구, 또 다자구 할망이지 뭐 하면서 정감 어린 핀잔이다.

죽령의 산신은
다자구 할머니. 단양문화원이 펴낸 『단양군 민속조사 보고 서(김영진1992)』에 따르면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죽령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國行祭)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작은 제사를 지낸다고 죽령 밑에 주석을 달았다. 지금의 죽령사(竹嶺祠)를 짓고 산신제의 틀을 갖춘 것은 대략 조선 중기로 보이는데 이때 등장하는 산신이 바로 다자구 할머니다.

산적에게 두 아들을 잃은 한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죽령의 산적을 잡는 데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토포군과 미리 짜고 산적굴에 들어갔다.
들자구야는 기다리라는 신호였고 다자구야는 공격 신호였다. 산적에게는 이름이 들자구다자구인 두 아들을 찾는다고 둘러댄 터였다. 마침내 산적이 모두 술 취해 잠 든 사이 노파의 다자구야 소리를 신호로 토포군이 들이닥쳐 산적을 섬멸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죽어 산신령이 된 다자구 할머니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소백은 다만 소백으로 산다 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이 땅의 모든 국행제를 금지시켰다. 죽령 산신제 역시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근근이 그 명맥을 이었다. 매바우에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과 9월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낸다. 날짜는 초정(初丁)인데 초정에 부정(不淨) 이 들면 중정(仲丁)으로 넘겼다가 중정마저 부정이 들면 또 하정(下丁)으로 넘긴다. 도가(都家:제사 준비를 맡은 집)로 뽑힌 집주인은 목욕재계하고 3일 동안 기도를 올려 정성을 들인다. 매바우에선 마을 사람 누구라도 산신당에 대한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다.

산신당 가는 길에 앞장을 선 김성락 옹은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길도 하필이면 마을과 산신당 사이로 고속도로를 뚫어 그곳은 이미 비산비령(非山非嶺)의 참혹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산마루까지 온통 민둥산이 되어 마치 가죽을 벗긴 짐승의 그것처럼 산천은 붉은 선혈을 떨구고 있었다. 죽령 북쪽 골짜기는 유독 심하여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을 감출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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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의 고갯길이 단양에 이르러 평지에 닿았다가 다시 슬쩍 솟구치는 곳이 남한강변의 적성산성이다. 국보 제198호 신라 적성비 또한 이곳에 있다. 마치 일부러 심술이라도 피운 듯 길은 그곳의 산마루까지 기어올라가 사정없이 산록을 벗겨냈다. 문득 멀리 돌아보니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 소백이 굽어보고 있다. 소백은 다만 소백으로 산다 하고.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7 8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고치령 ]


태백과 소백을 가르는 50리 험산 준령

이 세상 어디에 매양 변치 않는 길이 있으랴. 산다는 게 으레 그렇고 그런 거라고 오래 믿어 두었지만, 정녕 허다한 어느 길이 흘러도 변함없이 지난날만 같으랴. 그리하여 다시 문을 열고 길 위에 서면 이미 한참 전에 떠나온 길인 듯 새삼 물결치는 저 엄청난 숙업과도 같은 시간들의 행렬을 보라. , 몸과 마음 슬쩍 길 위의 시절에 얹어 밤도 없이 낮도 없이 뒹굴어온 날들에게 경배를! 끝내는 몸 하나 마음 하나 우거진 풀숲에 고개 숙여 아주 작은 추억마저 지우고 숨죽인 씨앗처럼 견디는 여름의 사랑이여.

길도 때로는 꼬리를 친다. 팽팽하게 당겨진 연실이 빈 겨울 하늘 너머 아주 오래 된 이야기를 탱탱 끌어당기듯이, 길도 가물가물 멀어지며 다가서며 내내 꼬리치는 길이 있다. 사는 동안 그저 무심히 마음 한 켠 묻어두었던,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생각들이 웅웅거리며 몰려나와 문득 어디론가 끌고 가는 미증유의 오솔길. 행여 그 길 끝에 천년 만년 기다려온 새 아침이라도 열리는지, 더러는 새도록 잠 못 이룬 그리운 님이라도 오시는지, 설레며 두근거리며 걷는 길이 있다. 흙먼지 폴폴 일어 바람 한 올 지나가면 신작로 따라 아득히 서서 울던 미루나무 슬슬 또 뒷걸음질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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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절, 평화로운 마을


풍기에서 소백을 따라 태백을 바라보면 길은 바야흐로 소문도 자자한 부석사(浮 石寺) 길이다. 절도 절이거니와 산천 또한 유별하고 기운이 비범하여 허튼 걸음으로 가 닿아도 언뜻 대화엄의 그림자를 밟고 돌아오는 가람. 백두대간이 문득 내륙으로 말머리를 돌려 서해를 향할 적에 그 남쪽 아래로 달아나는 영남의 산천을 붙들어 두기 위해 한 곳에 기둥을 세워 고삐를 묶었으니 부석사 절터가 바로 그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곳에 닿은 이들은 그 장중한 땅기운에 실려 그만 ' '를 잊으니 굳이 절집 아니어도 참말 도량 중에 도량이다.

부석사 길에 걸린 마을은 순흥, 단산, 부석 3개 면()이다. 본래 이들은 모두 순흥도호부를 따르던 마을이다. 시절이 바뀌면서 영주군이 되고 다시 영풍군이 되었다가 이제는 어엿한 영주시가 되어 하나씩 저마다의 면목을 거느린다. 논농사 를 주업으로 삼고 사과나 인삼같은 밭작물로 목돈을 만진다. 하나같이 인구 고작 2천에서 3천 명을 헤아리는 여두소읍(如斗小邑)이지만 물 좋고 인심 좋은 걸로 치면 그만한 땅이 더는 없는 곳이다. 부석사가 소문을 타면서 인파가 모박이 를 하는 탓에 더러 돈벌이를 궁량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나마도 여느 관광지와는 비교할 바 없이 단출하다. 반도 이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단연 첫 손에 꼽히는 부석사 입장료는 단돈 1천원. 좀 달라졌겠지 하고 다시 가보아도 여태 주차비를 받지 않는, 부석사는 그런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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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산 면소재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권중팔(81)옹은 본래 안동이 고향인 사람이다. 한약방은 대를 이어온 그의 가업이다. 한때 그는 만주 길림까지 흘러가 한약방을 열었다가 이 곳 단산에 터를 잡은 지 어언 40년이 넘었다. 그의 팔십 평생은 올곧게 약재더미에 묻혀 흘러갔다. 늘그막에 막상 정리를 하자니 왠지 서운하여 아직 붙들고 있다고 했다. 보꾹에 옹기종기 매어 단 약낭마다 한 움큼씩 그의 지난 풍상의 시절들이 담겨 있다. 약초 찾아 산마루 깨나 밟았을 듯하여 큰 산 너머 영월로 가는 고치령을 물으니 갈림길을 일러준다. 고치령에 가거들랑 연화동에 꼭 한번 들러보란 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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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동천 가는 길


부석사 길을 버리고 단산에서 길을 바꾸면 잘 닦은 포장도로가 10리 남짓 큰 산 발치로 기어든다. 산이 생기기를 사각이라 하여 모산이란 마을도 스쳐가고 마을 앞에 널찍한 바위가 놓였다 하여 좌석이란 마을도 지나간다. 흐르는 물이 좋아 냇가에 앉으면 물도 지나치게 맑아 오래 머물기가 민망하다. 새벽에 깨끗이 씻고 나온 맨발이 자꾸만 부끄럽다. 다만 저 또한 흐르는 바 되어 맑고 어린 여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재잘거린다. 졸졸졸졸.....

포장이 끝나는 길에서는 그만 세상의 모든 길도 함께 끝이 난다. 사람들은 돌아 서고, 흥청망청 따라오던 세상의 불빛들도 발길을 멈추고 이제 문명의 세상이다 했음을 알린다. 그로부터는 이제 길 아닌 길들의 세상이다. 이미 오래 전에 잃고 버린 뒤안의 길들만이 슬금슬금 그 지지리도 못난 자갈밭을 길로 삼는다. 아무렴, 이 세상 어디에 꽃수를 놓아 펼친 꿈결 같은 비단길이 있으랴. 그저 가고 가는 길. 만고강산 재 넘어가는 나비 춤사위면 또 어떠랴. 잃고 버린 뒤에야 비로소 이렇듯 가벼워지는 게 세상의 길인 것을. 잠시 고치령을 비켜 5리 남짓 연화동 가는 길엔 생전 처음 맡는 향내가 난다
.

첫눈에 벌써 연화동은 아예 세상과 인연 없는 사람들의 땅이다. 높고 푸른 산이 사방을 가로막고 두어 뼘 하늘은 아득히 쟁쟁하다. 마을이랄 것도 없이 대여섯 집이 군데군데 외딴 집처럼 흩어져 숨어 있고 이웃끼리 오가는 동네 길은 우거져 풀숲을 이루었다. 몇 집을 기웃거리다가 겨우 인기척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정연우(68) 씨는 6대를 연화동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터줏대감답게 그는 연화동의 지난 내력과 골골마다 들어앉은 옛이야기를 줄줄이 꿰어낸다. 그는 40년 이력의 소백산 심마니다. 소백산 구석구석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아마도 없을 거란다. 더덕, 속단, 산작약 같은 약재를 주로 캐지만 동안에 거둔 산삼만도 1 백 뿌리가 족히 넘는 진짜 '읫꾼'이다
.

태백 산신과 소백 산신이 만나서


풍수에 연화부수(蓮花浮水)라는 말이 있다. 물위에 뜬 연꽃이라 하였으니 거기 연화동처럼 생긴 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을 품은 탓에 마을도 그렇게 연화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산도 좋고 물도 좋다. 도무지 사람 냄새 적으니 늘 외롭지만 때로는 그런 일 또한 좋다. 언제고 꼭 한번 다시 와서 밤새도록 그 산바람 소리 같은 옛이야기를 듣겠노라고 정연우 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연화 동을 나서는데 이름 모를 산새가 운다.

고치령 고갯길은 본래 바탕도 험상한 흙먼지 길인 것을 지난 장마에 군데군데 패이고 무너져 여간만이 아니다.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슬슬 길마저도 어둡다. 해맑은 물소리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숲처럼 생각 많은 세상 사람 하나 자꾸 꼬리를 감추는 산구비를 거슬러 오른다. 길이란 게 으레 거칠고 험한 만큼 애써 지나고 나면 돌아보는 기쁨 또한 더욱 큰 법. 고갯마루 올라 저 아래 세상을 보면 정녕 애가 달아 나부끼던 도회지 날들 여태 거기 그렇게 바람 불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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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 태백과 소백은 그렇게 나뉜다. 고치령에 이르러 마침내 태백은 끝이 나고 이로부터 바야흐로 소백이 시작된다. 고치령 고갯마루 아담한 산신당에는 그리하여 태백 산신과 소백 산신을 함께 모신다. 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 산신이라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 산신이라 믿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고개 고치령이 오죽 이나 한스러웠으랴. 지금도 정월 열 나흗날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내니 형과 삼촌에게 죽은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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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북의 영남, 외로운 마락리

왠지 아득한 마음이 되어 산신당을 둘러보는데 저희들 마음도 그와 같은지 온갖 들꽃들이 빼곡 산신당을 둘러 피었다. 엷은 보랏빛 무릇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듬성듬성 샛노란 참나리가 산들거린다. 잔대꽃도 다투어 하늘빛 종소리를 달고 있다. 일삼아 생각을 놓고 한참을 앉았으니 다들 무에 그리 하고픈 말이 많은지 산신당 둘레가 온통 들꽃 소리로 가득하다. 가끔은 누구라도 와서 들어주어야 하는 것을, 이야기만 자라 산그늘을 덮는다.

이미 백두대간을 넘었지만 땅은 아직도 경상도 땅이다. 산신당 고갯마루 남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의 물은 장차 한강에 닿지만 웬일인지 영북과 영남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짐짓 올라온 길의 두 배는 될 법한 내리막길 끝에 그렇게 외떨어진 경상도 마을이 하나 숨었으니 이름하여 마락리(馬落里). 슬그머니 백두대간을 넘어와 유일하게 한강수계에 터를 잡은 경상도의 서러운 의붓아들. 마을 골짜기 말굽이 바위에서 순흥과 영월을 오가던 보부상 행렬의 말들이 자주 떨어져 죽었다 하여 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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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고치령 너머 단산면 옥대초등학교의 분교가 마락리에 있었다. 1964년에 문 을 열어 모두 147명의 졸업생을 세상으로 내보낸 마락분교는 지난 1991년 문을 닫았다. 산간에 이미 아이 울음소리 그쳤으니 학교인들 더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집도 하나같이 낡은 옛집이고 골짜기 논밭들도 많이 묵었다. 벼농사의 벌이가 워낙 시원찮은 탓인지 논이며 밭이며 모두 기장이나 율무 같은 밭작물을 심었다. 버스가 다닐 리 만무한 이 궁벽한 오지 마락리에 사는 일이 참으로 신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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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과 소백이 품은 은둔의 땅

골짜기를 따라 마락리 서낭당을 지나면 길은 마침내 충청도로 넘어서니 그 곳이 바로 정감록의 땅 의풍이다. 의풍 또한 그로부터 사방 어느 길이든 몇 십리 큰 재를 넘어야만 대처로 통하는 충청도 제일의 오지 마을이다. 동쪽으로 마구령(해 발 820)을 넘으면 바투 부석사 기슭으로 내려서고 서쪽은 면소재지 영춘으로 넘는 50리 베틀재가 가로막혔다. 남쪽은 고치령이요, 북쪽으로 삿갓 시인 김병연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을 지나면 영월에 닿는다.

의풍 골짜기 끝에 여섯 집이 사는 어은동(마을의 생김이 고기가 숨은 모양이라 하여 그렇게 불린다) 뒤편에 솟은 삼도봉(해발 1063)에서 강원과 충북과 경북이 갈린다. 가장 큰 마을인 솔밑에는 장터거리가 있다. 한때 삼도의 행상들이 모여 제법 큰 난장을 벌였지만 지금은 새술막 하나도 남은 게 없다. 솔밑에 사는 박경환(51)씨는 정감록의 비결지(秘訣地)를 찾아 의풍에 자리를 잡은 조부로부터 4 대를 이 곳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억센 내륙의 장꾼들이 모두 모여 사람 구경, 돈 구경, 싸움 구경으로 신물이 났었다고 옛날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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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풍 사람 열의 아홉은 한결같이 정감록의 후예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은 태백과 소백이 품은 정감록의 비결지가 바로 의풍이라 믿는다. 와골에 사는 조광노(47)씨 역시 정감록 한 권 달랑 품고 청송에서 이 곳으로 솔가하여 온 조부 이래 4대를 살았다. 그의 부친이 그러했고 그의 삶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산간에 그저 있는 대로 심고 거두어 욕심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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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69, 와골)씨는 30여년 전에 본인이 직접 삼척에서 솔가하여 의풍으로 왔다. 한문 공부가 깊은 그는 정감록이 아니라 격암 남사고의 비결서를 보고 이 곳에 뿌리를 내렸다 한다. 그는 지금도 손수 농사를 짓는다. 삶이 이미 황혼에 닿았지만 그의 몸짓 하 나, 말 한마디는 더없이 정갈하고 공손하다. 언뜻 비승비속(非僧非俗)이란 말도 제 값을 다 못하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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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노래하던 시인 길에 잠들고


우리가 누구라서 다르랴. 까마득히 먼 날에 집을 떠나 세세생생 모래알처럼 많은 낮과 밤을 풍찬노숙으로 흘러가고 또 흘러가는 저 시냇물을 닮은 것을. 어디로부터 와 장차 또 어디로 가는가. 한 하늘과 한 대지의 저 도도하고 거침없는 율법 아래 오직 인생유전이란 말이 날마다 날마다 시름겨워 몸 뒤척이는 것을. 사람과 세상의 일이 본래 그렇게 아득하였으나, 그러나 가슴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빛 하나를 품고 삿갓으로 일월을 가렸던 시인이 바로 난고 김병연(1807-1863)이다.

의풍에서 북쪽으로 10, 김삿갓 무덤으로 가는 길은 험로 중의 험로이다. 전에 더러 배짱 좋은 참배객들이 승용차를 끌고 그 길로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장마 끝이라 그런지 아예 엄두를 내는 이가 없다. 더러 지프차들이 굉음을 내며 덤벼드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 서울 번호판을 단 승합차 한 대가 길에 빠져 옴나위없이 길이 막혔다. 가다보면 더러 그렇게 속절없이 빠져들고 마는 게 우리네 길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노루목 가는 그 길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다. 진작에 덫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걸려들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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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은 언제나 술판이다. 몇 해 전부터 동네(동네라야 모두 다섯 집이다) 아낙 몇몇이 비닐집을 짓고 주전자에 담은 술과 안주를 파는데 어느 누구든 그냥 지나 치는 법이 없다. 자나깨나 으레 술마시는 일밖에 달리 길이 없었던 시인의 무덤에 왔으니 그저 한잔씩 마시자는 얘기다. 고치령을 함께 넘은 사진작가 홍창식 형은 무덤 앞 골짜기를 뒤덮은 차일이 영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냥 두자고 했다. 아니 우리도 그냥 그 하늘을 가린 차일 속으로 들어가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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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돌아가자니 그도 어렵고 머물자니 그 역시 어려워
그저 몇 날이고 길을 헤매다가 길섶에 스러지노라


<
「蘭皐平生詩」 마지막 구절>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7/9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두문동재(싸리재) ]

세상 문 닫고 돌아앉은 아라리 고개

길은 어디에나 있다. 길을 잃은 곳, 그 곳에도 길은 있다. 사람이란 으레 크고 밝은 길에 모여 저마다의 삶을 다투는 법이지만 더러는 저 아주 좁고 어두운 세상의 뒤안길로 슬며시 등을 돌려 세상과는 아예 몇 겹 담을 쌓고 살기도 한다. 어느 길이든 그저 모두 변함없는 세상의 날들이다. ! 누가 함부로 길을 잃었다 하는가? 까마득한 무렵, 산과 들에 짐승들이 먼저 길을 내고 사람들 또한 생각 많은 짐승으로 사는 동안, 길은 그렇게 어디에나 있었다. 그리하여 길이란 잃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버리는 것이다. 시절이 가고 바람이 차가워져 가지 끝에 걸린 나뭇잎 하나 홀연 몸을 던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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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날, 그렇게 길을 떠난 이들이 있었다. 속절없이 버리고 떠난 뒤에야 다시 얻는 세상의 길을 따라 기약도 희망도 없이 그렇게 시나브로 잊혀져 간 이들이 있었다. 훗날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듯 어디 닿을 바 없이 멀리 흘러가 버린 그들의 길을 세상에서 가장 사무치는 길이라 믿었다. 생각 같아서는 어찌 그 길만이 또한 외길이랴 묻고 싶지만은 다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길이라면 대체 무엇이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으랴. 지나왔으므로 돌아보면 더러 아련하고 가고 있으므로 끝내 멈출 수 없는 길. 정선 땅에 가면 길은 모두 하나같이 그렇게 속 깊은 아라리 가락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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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밝은 땅, 크게 어두운 땅


영월에서 해뜨는 쪽으로 40리 밖이 석항(石項)이다. 옛날에 돌항소(乭項所)라는 천민집단 구역이 있었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영월을 떠난 태백 가는 길이 그 석항에 닿으면 서로 갈래를 짓고 둘로 나뉜다. 남쪽 길로는 수라리재와 화방재를 넘어 태백에 닿고 북쪽 길로는 정선을 비켜 사북과 고한을 지나 두문동재를 넘어 또한 태백에 닿는다.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진다는 화방재(935m)와 포장 길이 넘는 고개로는 남한 땅에서 가장 높다는 두문동재(1,268m)가 모두 백두대간의 고개이다.

태백이란 이름의 뿌리는 가깝게는 태백산(1,568m)이며 멀게는 민족의 종산 백두산(2,744m)에 이른다. 태백이란 '크게 밝다'는 뜻이니 한밝달이나 한배달로 등장하는 단군의 조국설화(肇國說話)가 그 근원이다. 본래 태백 땅의 지명에는 황지(黃池)와 장성(長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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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는 마을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있어 천황(天潢)이라 부르다가 황지로 바뀌었으니 지금도 태백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그 연못은 낙동강의 시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장성 또한 본래는 장생이라 하여 흔히 일컫는 장승이 많대서 얻은 이름이다. 1981, 탄광이 날로 인구를 불리면서 황지읍과 장성읍을 모아 태백이란 이름으로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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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제 1의 광도(鑛都)이다. 일제 무렵,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조선총독부 보유 탄전의 광업권을 인수하여 장성의 석탄을 캐낸 것이 탄광의 시작이다. 태백의 연감을 들추어보니 1981년의 광부 수가 무려 19,375명에 달했다 한다. 집계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2만 명을 훨씬 웃돌았다. 1987년 태백의 석탄 생산량은 640만 톤이나 되어 전국 생산량의 30%에 이르렀다. 강아지들마저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광산촌의 영화. 그러나 그 영화는 이제 흉물스럽게 버려진 탄광과 빈집을 뒤로 한 채 저마다 진폐를 쿨룩이며 대처로 떠난 광부들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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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고을 정선에 부는 바람


정선은 동쪽으로 동해, 삼척, 태백의 3개 시와 만나고 남쪽의 영월군과 서쪽의 평창군, 그리고 북쪽으로 강릉시에 어깨를 걸친다. 사방이 크고 작은 산으로 막히고 골짜기마다 맑은 여울이 흘러 예로부터 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평창 황병산(1,407m)에서 발원하여 횡계를 지나 남하하는 송천이 정선과 강릉의 경계를 이루는 석병산(1,055m) 위쪽 두리봉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굽이치는 임계천과 만나는 곳이 바로 유명한 여량의 아우라지다. 임계천이 아우라지에 닿기 전에 더불어 온 골지천은 강의 하구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서 출발하는 이른바 남한강의 발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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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에서 여울은 아침 햇살과 어우러진 강빛이 더없이 좋다하여 조양강이라 불리면서 오대산에서 내려온 오대천을 거느리고 정선읍으로 흘러든다. 정선읍에서 또한 고한 북쪽 삼척과의 경계에서 뻗어온 동대천을 맞아들여 흐르다가 다시 태백의 함백산(1,593m)에서 출발하여 고한과 사북을 지나온 동남천과 만나면 그로부터는 동강이 되어 영월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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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이 한결같이 '토지는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고 적은 정선은 본래부터 먹고 사는 일마저도 아주 고단한 땅이었다. 기껏해야 기장이나 피, , 밀보리 같은 밭작물을 심어 그나마도 적게 거두고 나머지는 강이나 산에서 얻는 짐승들의 가죽이나 약재가 고작이다. 다만 땅 위의 삶터가 그렇게 마뜩치 않은 터라 자연이 땅 속에 보물을 숨겼다가 내어주니 숱한 매장 광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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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정선군 편에는 '금과 철이 많이 나고 옥과 비슷한 돌고드름이 나며, 벼루를 만드는 푸른 돌이 난다'고 적었다. 실재로 정선 땅의 9할이 광물 채굴권에 속한다고 한다. 탄광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팔도공화국'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잠깐의 좋았던(?) 시절 또한 그렇게 흘러가고 이제 정선에 부는 바람은 자나깨나 오로지 관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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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 그리고 사북, 고한의 운명


사북, 고한 사람 열의 아홉은 으레 탄광을 터전으로 밥을 먹고 살았다. 사북은 사음대(舍音垈, 사음은 마름의 한자음)와 북일(北日)이란 옛마을을 뭉뚱그려 생긴 이름이고 고한은 고토일(古土日)과 물한리(沕汗里)를 합쳐 만들었으니 모두 일제 무렵의 흔적이다. 한때 두 곳을 합쳐 6만여 명에 이르던 인구 덕택에 두 곳 모두 읍이 되었지만 이제 남은 인구는 고작 1 7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 검은 빛깔로 뒤덮인 석탄 왕국이 저물어 간 것은 불과 2, 3년 전이었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떠나고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남았다. 손에 쥔 것 없이 대처로 떠난 이들의 고난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만 탄광이 문을 닫은 폐광촌에 남은 이들의 살길 또한 막막하기만 했다. 생업이 바닥을 드러내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남은 이들의 몸부림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어딘가 숨어있을 길을 찾아 모두들 두리번거렸지만 끝내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관광!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이 낯선 화두에 사람들이 촉수을 곤두세운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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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맑고 산 좋은 고을이라면 굳이 소문을 내지 않아도 으레 인파로 몸살을 앓는 게 이즈음 국토의 현실이다. 그러나 정선도 정선 나름, 아우라지나 정선 소금강쯤은 되어야 그런 말이 어울릴 듯 싶고 정선 최남단의 전형적인 광산촌 사북, 고한에선 그것마저도 꿈같은 얘기다. 달리 마땅한 관광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다해도 온통 탄더미로 뒤덮인 흉흉한 폐광촌에 사람 발길 끌어들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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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의 비경 414번 지방도로


백두대간은 태백 북쪽의 매봉산(1,303m, 다른 이름은 천의봉이다)에 이르러 슬쩍 방향을 틀면서 함백산을 세우고 다시 태백산을 지나면서 완연하게 서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고한에서 매봉산과 함백산 사이를 타고 넘으면 두문동재고 영월에서 함백산과 태백산 사이를 타고 넘으면 화방재다. 전에는 없더니 화방재 정상에서 만항재를 넘어 고한으로 떨어지는 잘 닦인 지방도로가 있어 넘어보니 참으로 절경이다. 만항재 고갯마루에는 함백산 정상이 부르면 들릴 듯 지척으로 다가서 있었다.

만항재를 넘어 골짜기가 고한에 닿기 전에 만나는 아담한 옛 절이 적멸보궁의 도량 정암사다. 정암사 계곡에는 열목어가 산다. 광산이 한창이던 무렵에도 이 곳은 차고 맑은 물이 더없이 좋던 곳인데 웬일인지 물빛이 예전만 못하다. 정암사에서 오리 남짓 골짜기를 타고 내리면 고한읍에서 두문동재로 오르는 갈래길을 만난다. 이로부터는 골짜기마다 걸린 탄광에서 흘러내린 물이 온통 시커먼 냇물을 이루는 곳인데 탄광들이 문을 닫은 지금은 암회색을 띠고 있다. 갱구에서 나오는 폐수를 정화하기 위해 약품처리를 하는 탓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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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고한에는 오랜 논란 끝에 인근 백운산(1,426m) 기슭으로 결정된 카지노 사업에 대한 이야기만 무성하다. '살다보니 어쩌다가 도박장 따위에 목을 매는 신세'가 되었지만 언감생심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것을 어쩌랴. 아니 그보다도 더욱 절박한 것은 당장 카지노가 밥줄에 보탬을 줄 5년 후까지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마저도 날로 힘겨워지는 지금, 무작정 카지노만 바라보며 다만 2, 3년이라도 견뎌낼 일이 고한 사람들에겐 그저 난감한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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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문 닫고 돌아앉은 두문동


고한읍에서 20, 다시 두문동재 정상에서 태백까지 30. 두문동재는 그렇게 험준한 50리 길을 38번 국도가 되어 넘는다. 두문동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버려진 탄더미가 그대로 산을 이루고 광부 일가들이 두고 간 빈집들이 초췌한 몰골로 즐비하다. 그래도 누군가의 손길이 탄더미가 쌓인 산비탈마다 애써 나무라도 심은 듯 듬성듬성 자라는 초목들이 반갑고 더러 길가에 손 흔드는 갈꽃들은 그 어느 땅보다도 한결 어여쁘다.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를 들추어보니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 한다. 전설을 따르자면, 회유에 지친 조선의 태조는 끝내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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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대성초등학교는 월요일 오전인데도 아이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실마다 가득했던 아이들은 이제 고작 10명뿐이란다. 광부인 듯한 중년의 사내 하나가 벌써부터 벌겋게 낮술이 올라 운동장을 서성이며 아무렇게나 삿대질을 해대고 골짜기에는 시커먼 폐수와 함께 버려진 기계에서 흘러내린 녹물이 벌겋게 고였다. 끼니를 걸렀는지 쓰레기 더미를 뒤집는 동네 강아지들을 쫓으며 한 집을 지나면 대여섯 집은 빈집이다. 아뿔싸, 두문동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삶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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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에서 갈래치는 낙동정맥


두문동을 나와 무거운 마음을 들고 두문동재를 오른다. 이곳의 이정표는 물론 지도에도 하나같이 두문동재를 싸리재라 적었다. 그렇지만 싸리재는 재 너머 싸리밭에서 호명골로 넘어가는 또 다른 고개라는 게 태백문화원 김강산(47)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비로소 그 곳의 표지판에는 작은 글씨로 괄호를 치고 두문동재라 적혀 있다.

두문동재 정상에 서면 절대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중의 하나가 바로 매봉산이다. 매봉산의 한 봉우리(1,145m)에서 바야흐로 백두대간과 갈래치는 낙동정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매봉산 위쪽의 백두대간 일부와 한 줄로 그어 태백산맥이라 잘못 부르는 그 낙동정맥은 이로부터 부산 땅 몰운대까지의 천리 길을 떠나간다. 그 낙동정맥과 내륙으로 지리산까지 내달리는 백두대간이 벌린 품안이 바로 낙동강 수계의 경상도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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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이 분기하는 매봉산의 장관을 바라보며 두문동재를 넘어서면 그로부터는 태백 땅이다. 친절하게도 고갯길 중턱에 널찍한 빈터를 만들어 차를 세우고 살아 꿈틀거리는 큰 산 연봉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아주 급한 길이 아니라면 꼭 한 번쯤 걸음을 멈추어 결코 후회될 바가 없는 곳이다. 그 곳에 앉아 담배 한 대 참이 지나면 백두산에 뻗어내려 국토의 척량을 이루는 장중한 산줄기의 힘이 온몸에 전류처럼 흐른다. 늘 살아 있음으로 또한 힘차게 용솟음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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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잠 못 이룬 태백의 밤

그날 저녁, 태백의 한 여관방을 뒹굴면서 나는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 보고 온 그 황량한 두문동 생각이 도무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희망없음이란 또한 무엇이겠는가. 어린 아들딸들이 공부하는 학교 한 쪽에서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는 무기력한 아비들. 병든 지아비와 철없는 자식들을 버리고 대처로 떠난 무정한 어미들. 진폐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몹쓸 병이 되어 두억시니처럼 마을을 뒤덮고 있는 깜깜한 절망.

새벽 무렵, 까무륵 잠이 들었다가 나는 꿈을 꾸었다. 몇 해 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 베트남 남부의 광활한 벌판이었다. 미군에 의해 무차별 살포된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의 땅. 그 황량한 죽음의 땅에 다시 풀씨가 날고 초목이 새순을 틔워 마침내 지붕보다 높이 자란 열대우림을 보면서 나는 생명에 대한 끝없는 경외와 존경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비록 검고 숨막히는 땅. 틀림없이 저 황폐한, 가도 가도 탄가루뿐인 산천에도 생명의 나무가 다시 자라고 들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날은 꼭 오리니, 서러워 말라 두문동이여! 지난 날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우리들의 시린 등을 덥혀주던 참으로 따듯했던 한 시대의 온돌이여
!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7/10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백복령 ]

동해 푸른 물결 손 흔드는 소금 고개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
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봉령 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정선엮음 아라리 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우라지 여량에서 소금 길을 따라 동해를 바라보면 오십 리를 어름하여 산 마을 임계에 닿는다. 길은 큰너그니, 작은너그니 하는 숨가쁜 고갯길에 걸리고 강물은 길과 헤어져 은밀한 비경를 이루며 그저 해맑은 곳으로 흐른다. 골지천(발원지의 지명을 따르면 창죽천이 옳은 이름이다. 옛 문헌에는 죽현천이다)이 임 계에서 물이 불어 아우라지로 달리는 곳에 아홉의 아름다운 경치가 좋다 하여 구미정(九美亭)이라 부르는 정자가 하나 있다. 비좁은 강언덕에 온갖 모양의 암 벽이 둘러치고 푸른 여울이 협곡을 급하게 치달아 내리는 풍경이 과연 장관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임계를 두고, "고려 때에 이승휴(李承休)가 여기에 숨어 살았고 근래에는 찰방 이자( )가 벼슬하지 않고 산 속에 집을 지어 살았다"고 적었다. 앞의 말은 동안거사 이승휴가 두타산(해발 1,353) 자락에 은거하며 『제 왕운기』를 지은 내력이고 나중 말은 숙종 때에 살았던 구미정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다. 『택리지』는 또한 "산간에 평평한 들이 조금 열린데다 논도 있고 시냇가 바위도 아주 훌륭하다. 농사짓기와 고기잡이가 모두 알맞으니 이곳은 별 다른 하나의 동천(洞天)"이라고 임계를 극찬했다.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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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정선 쌀농사의 절반은 임계에서 난다. 또한 남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금대봉아래 검룡소에서 흘러온 골지천과 임계 동북의 여울을 한데 모아 흘러온 송계천(임계천)이 만나 제법 넓고 깊은 강의 풍모를 갖추는 곳이 바로 임계다. 6년 전, 사방으로 포장길이 열리면서 정선에서 삼척으로 넘는 42 번 국도와 강릉에서 태백으로 달리는 35번 국도가 서로 엇걸리는 임계는 이제 아주 부산한 길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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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진 '임계 장날'


장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은 으레 대화, 진부, 임계 장을 먼저 꼽는다. 그 세 곳의 장 가운데 딱히 어느 장 하나를 더 크다 말하면 나머지 두 장은 틀림없이 서운하여 돌아앉는다. 저마다 찾아가 물어보면 으레 모두 제가 더 컸다고 큰소리 땅땅 친다. 임계에 가 물었으니 물론 임계 장이 으뜸으로 컸다. 분명한 것은, 장터에 이력이 난 장돌림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임계 장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부터 꼭 13년 전에 임계 장을 다녀간 신경림 시인은 다음처럼 장터 풍경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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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장이 무엇으로 유명하냐고 주인에게 물었더니 어물이 싼 것으로 유명하다고 대답한다. 어물을 트럭에 싣고 들어왔다가 더 들어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서 싸구려로 다 팔아 치운다는 것이다. (중략) 목물전에는 걸쿤대, 용수, 소쿠리 등 예스러운 농구도 제법 눈에 띈다. 시장 밖으로도 농기구상은 유난히 많다. (중략) 경운기 보습이며 플라스틱 물조리며 헌 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삼태기 따위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또 잡화 가게에는 스폰지 수세미가 많이 팔리고 있다. (중략) 특히 네모 반듯한 메주를 들고 나온 아낙네들이 여럿 있었는데, 장사치들은 3천원 이상은 어림없다고 다그치고 있었고, 아낙네들은 35백원씩은 받아야 한다며 메주덩이를 움켜잡고 내놓지 않고 있었다." 『민요기행1(한길사) 176


시인 김민형과 함께 영월의 강마을에서 자고 정선을 지나 임계에 닿은 날은 부러 맞추어 간 것도 아닌데 용케 임계 장날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짜했다는 임계 장의 소문은 이미 옛말이 되어 있었다. 파장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도 장터는 그 저 한산하다. 물건파는 사람이 열이면 구경꾼은 하나 정도이고 그나마도 물건 이 거래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어쩌다가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영감님 양말이나 매만지다 그냥 가고, 트럭에 실려 재를 넘어온 유행지난 옷가지는 아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딴전을 피운다.

어물이 싸다는 말도 이미 헛말이 되었는지 어물전에도 파리떼만 날고, 한때 좋았던 시절의 여운인지 그래도 시골 장터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농기구 좌판이나 방물장수가 더러 구색을 갖추었지만 아무래도 흥청대는 장터 풍경은 오래 전에 사라진 모양이다. 장터 한 구석에 토정비결과 만세력 같은 옛 책을 펼쳐놓고 있는 초로의 장꾼에게 '뭘 좀 팔았느냐'고 물으니까 고개만 가로저을 뿐 웃으면서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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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고을, 열녀 마을


1975
, 임계댐 수몰지구가 고시되면서 임계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치달았다. 구미정 위쪽의 임계천 상류를 막아 고도가 높은 백두대간 서쪽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건설한다는 것이 임계댐의 취지였다. 상수원 확보는 물론 장차 백복령 (해발 780)에 터널을 뚫어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백두대간 동쪽으로 물길을 떨구는 이른바 유역변경식 발전이 그 목표였다.

대부분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형에 설계되었던 그 임계댐은 결국 10년을 미적거리다가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10년이 가는 동안, 새집은 물론 서까래 하나 고치는 일마저도 금했던 탓에 임계의 인구는 절반이나 넘게 줄었다. 하기야, 댐이 되었더라면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터이다. 더러는 그 참에 아예 고향을 버리고 더러는 또 돌아왔지만 그래도 그만하기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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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골지천을 거슬러 오르면 태백에 닿고 북쪽으로 삽당령을 넘으면 강릉이다. 서쪽은 정선이고 동쪽으로 백복령을 넘어서면 바투 동해 와 삼척이 내려다보인다. 사방 어느 곳이든 그저 백리 길을 조금 덜하기도 하고 더러는 조금 웃돌기도 한다. 임계에서 백복령을 향하여 십리 남짓한 곳이 본래 옛날의 임계가 있었다는 관말이다. 관말에서 다시 십리쯤 더 가면 길섶 저편으로 자그마한 효자문이 하나 있는데 지명이 장성거리다. 임진왜란에 백복령을 넘어 쳐들어오는 왜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나무로 장승을 깎아 세워 군사로 위장했다는 전설을 품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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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문의 주인공은 박문언(朴文彦, 1786-1833)이다. 『정선군지』에 실려 있는 그의 행장을 살펴보니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여홍(汝弘)이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농사일로 겨우 부모님을 섬겼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독사에 물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의원의 말이 멧돼지 쓸개가 영험하다 하여 무작정 산중을 헤매 는데 돌연 호랑이가 멧돼지를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또한 새가 게(川蟹)를 물어다 주었다거나, 학이 산삼을 물어다 주었다거나 하는 대부분 과장된 이야기가 그 효행의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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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령 구비 외진 마을 '군대'


임계에서 오르는 백복령 고갯길에는 유달리 군사적인 땅이름이 많다. 무엇보다도 임계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석이암산(해발 970) 중턱에 걸린 장찬성(張贊城)이 그 근원이다. 가을 햇살에 잔뜩 독이 올랐을 뱀을 저어하며 길도 없는 풀숲을 헤치고 올라보니 성곽은 찾을 길이 없고 하나같이 도굴의 흔적이 역력한 고분들이 널려 있다. 다음날, 임계 면장을 지냈다는 김대중(73, 임계면 송계리)옹에게 들으니 고분군 아래 더러 온전한 성벽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우거진 풀숲에 숨어 있어 초행자의 눈에는 띄지 않을 수밖에.

장찬성의 축성 시기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진용선의 『강원도 산성기행』에는 고구려의 횡혈식 고분이 널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략 고구려가 죽령 서북 지역으로 진출하던 6세기 말엽으로 어림잡고 있다. 또한 장찬성이란 이름도 영춘의 온달성이나 영월의 왕검성처럼 북방 계통의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어찌 되었든 장찬성을 중심으로 하여 백복령 골짜기에는 '마상골', '형틀 거리', '기추목이', '검무평' 같은 군사와 관련된 이름이 곳곳에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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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거리에서 백복령의 들목에 놓인 갈고개를 넘어 만나는 군대(軍垈) 마을도 그중 하나이다. 장찬 장군의 군대가 머물던 곳이라는 얘기다. 갈고개와 백복령 구비길에 걸린 군대 마을은 배추와 무같은 고랭지 채소와 감자가 주업이다. 비록 모두 하나같이 산비탈 화전밭뿐이지만 꽤 널찍한 이랑마다 감자캐기가 한창 이다. 고갯길에서 부르면 들릴 듯한 거리에 보이는 군대 분교의 식구는 열두 명의 아이들과 두 분의 선생님이 고작이다. 전에는 더없이 궁벽한 산촌이 군대 마을이었지만 이제 고랭지 채소의 벌이가 낙낙하고 마을길도 포장되어 딱히 불편 함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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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령, 그리고 동해 푸른 물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 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아무래도 어딘가 께름직한 느낌이다. 임계 면의 김대중 옹은 주변의 군사적인 이름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푸는데 그도 시원한 맛은 없어 보인다. 문헌을 들추어보니 『택리지』에 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 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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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글이 이미 그랬으니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 싶다. 다만 오늘날 느닷없이 등장하여 일사불란하게 쓰이는 백복령(白伏嶺)이란 이름의 출처가 자못 궁금하다. 그 이름을 자꾸 되뇌어 보면서 나는 웬일인지 불쾌한 느낌을 감출 길이 없다. 아무래도 냄새가 수상하다. 제기랄, 나는 언제쯤에나 식민지의 후예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끄럽게, 아주 부끄럽게 다만 백두대간의 혈맥이 꿈틀대는 백복령 정상에 서서 동해를 본다. 저거였을까? 뼈에 사무치는 해협을 건너와 국토의 해안에 포말로 부서져 안기는 저 동해 바다의 하얀 눈물이었을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다시 동해 바다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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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백두대간을 끊다니


금강산과 설악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오대산 아래 대관령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바투 백복령을 건너 청옥산과 두타산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창창한 동해를 거느리고 또 한편으로는 금쪽같은 한강 유역을 품에 안아 무릇 대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용비봉무(龍飛鳳舞)로 남진하는 곳이다. 거기 아무데나 부지런히 올라 웅혼한 대간의 기상으로 바다를 보고 또 땅을 보라. 우리가 언제부터 이 쟁쟁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었는지, 우리가 얼마나 먼 날로부터 쉬지 않고 숨가쁘게 달려와 또한 이 곳에 이르렀는지.

그런데, 아뿔싸! 백두대간이 끊어져버렸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시 보고 또 보아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근은 석회석이었다. 국토 개발의 역군, 시멘트라는 문명의 골리앗이 바로 그 범행의 배후였다. 존속에게 참수당한 우리의 백두대간. 끔찍했다. 자병산(해발 873)에서 백복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목덜미는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난 채로 만신창이가 되어 살점이 흩날리고 선혈이 낭자하다. 비명도 없이, 몸부림도 없이 저 지경을 당한 백두대간과 더불어 우리는 장차 또 어디로 가려는가. 갈 수 있겠는가
?

덮어야 한다. 당장 저 잘려나간 대간의 목을 새 살로 덮고 꺼져가는 대간의 숨결을 되살려 내야 한다. 백두대간이란 그냥 불거진 산천만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온전한 하나됨은 갈라진 조국의 올곧은 화두이며 민족의 애타는 염원이다. 오로지 그 날만을 기다리다가, 오로지 그 날만을 위해 살다가 먼저 간 많은 이들 이 있었다. 자나깨나 그 열망으로 밥을 먹고 그 목마름으로 숨을 쉬는 이들이 지금도 수 없이 많다. 덮어야 한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함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천연자원이 아니다. 그깟 조국 산천을 온통 시멘트로 뒤덮는 일쯤이야 좀 늦어도 괜찮다. 백두대간을 되살려라! 부탁이다. ,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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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묵호의 추억


대간 동쪽의 백복령 고갯길은 중턱에서 나뉘어 한 줄기는 옥계로 가고 또 한 줄기는 동해와 삼척으로 간다. 옥계 길은 또한 남면치란 이름으로 해안을 향해 떨어지고 삼척 길은 유명한 무릉계곡의 들목을 지나 동해안을 달리는 7번 국도 에서 동해시와 삼척시가 남북으로 갈린다. 삼척은 본래부터 옛 고을이고 동해는 지난 1980, 묵호읍과 북평읍을 합쳐 새로운 이름으로 시가 되었다.

묵호항에서 해안선을 따라 두어 마장, 횟집이 늘어선 여느 민박집에 여장을 풀 었다. 돌아보니 참으로 먼길을 왔다. '돗제비골'이라 부르는 작은 해안 마을의 밤. 지난 여름 한철의 몸살을 말끔히 털어내고 해풍에 몸을 말리는 오징어가 풍년이다. 아직 여행 길이 많이 남았지만 왠지 적막한 마음이 되어 '부담 없는 집 '이란 허름한 천막을 열고 들어가 오징어 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산 오징어 세 마리에 만원. 멀리 수평선 너머로 꽃등을 밝힌 오징어잡이 배가 파도에 실려 남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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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7/11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한계령 ]

우발라화 눈꽃 피는 남설악의 절경

눈이 내린다. 소양강 물길 삼백 리는 그저 환한 밤중이다. 이미 지나온 밝은 길도 흰 눈에 덮이고 아직 가지 못한 어둔 길도 흰 눈에 가렸다. 천지간이 그쯤 되어 하늘과 땅이 모두 분별을 잃었으니 길 위의 사람 마음 또한 생각없이 가뿐하다. 새삼 무엇을 두고 하늘이라 이르고 또 무엇을 땅이라 하겠는가. 적설이 키를 덮어 케케묵은 옛일을 잊고 나면 그뿐, 사람과 땅과 하늘이 내내 하나이던 것을. 삼 년 석 달을 못살고 죽은 어린 누이도 오늘은 한없이 착하기만 하여 달빛도 별빛도 없는 밤이 이토록 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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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에 눈이 부셔 길을 잃었네. 소양강 얼음 우는 소리에 귀가 먹었네. 안 보이는 눈으로 산을 넘고 안 들리는 귀로 강을 건너 겨울 설악으로 드는 길. 차라리 눈 속에 갇혀 한 천년쯤을 설인(雪人)으로 견디면 까막눈이 열릴까. 아니면 그도 저도 다 버리고 소양강 얼음장 아래 빙인(氷人)으로 한 백년쯤을 버티면 먹귀가 뚫 릴까. 멀고 아득하여 답답하여라. 본래 길떠나던 자리 이미 눈보라에 휘말려 기억에도 없으니 돌아갈 자리 또한 어디에도 없는 것을, , 여태 온 길을 접고 나그네는 또 길을 묻는다
.

'
인제' 가니 폭설이 길을 막고

마침내 길이 끊어지면 번뇌도 곧 멈추리. 눈도 이만하면 이미 혁명이다. 떠도 감아도 막무가내로 덤벼 드는 눈보라의 반란. 쌓인 눈이 벌써 발목을 덮었지만 갈증도 없이 눈뜨는 인제의 새벽을 틈타 다시 눈이 내린다. 시인 박인환의 생가를 들러보자던 간밤의 생각을 앞세우고 인제군청에 근무하는 최병헌(53, 군정개발과장) 시인을 찾아갔다. 박인환은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에서 태어나 11살 무렵까지 인제에서 살았다. 31살로 생애를 접은 시인의 생가는 소양강 물가에 새로 꾸린 택지 개발에 밀려 이미 흔적을 잃었다.

인제는 본래 오사회(烏斯回)라 부르던 맥국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저족현(猪足懸) 이라 하고 신라가 희제현( 蹄縣)이라 부른 것은 생김이 돼지 발굽을 닮은 탓이었고, 오늘날의 인제(麟蹄)란 이름을 얻은 것은 고려 초엽이었으니 돼지보다는 기린이 영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린이야 어차피 풍문으로만 듣던 짐승이고 보면 '사슴이 백년 묵어 기린이 된다'는 전설에 기대어 한껏 신비감을 자아낸 이름이다. 내린천이 인제로 흘러오는 길목의 지명은 조선 태종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기린(麒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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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면과 상남면은 모두 백두대간의 곁가지 방태산(해발 1436) 기슭에 걸린 마을이다. 인제에서도 오지를 들먹이면 으레 다투어 꼽히는 곳이 수두룩하고 해맑은 내린천이 순박하게 대처길을 마다 않는 태고의 서정이 머무는 곳이다. 한때 몸서리를 치던 내린천 댐에 관한 소문은 이제 다소나마 가라앉은 분위기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한 후보는 댐을 만들되 보상을 두둑하게 하겠노라고 공약을 걸었다가 욕을 남박으로 먹었단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인제에선 그 후보의 표가 제일 많았다. 민생의 마음이야 어차피 물류를 따르게 마련이니 그도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내린천의 무사함은 새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이었다니 우선은 믿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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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 상류 물 맑은 '미륵천'


인제 어름, 소양강 상류의 옛 이름은 미륵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쓰기를, "미륵천은 그 물줄기가 네 갈래로 나오니, 하나는 소동라령(所冬羅嶺)에서 나오 고, 하나는 소파령(所波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서화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춘천부 기린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소동라령은 한계령의 옛 이름이니 지금의 한계천이 그 하나요, 소파령의 물길이란 진부령과 미시령에서 흘러오는 북천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서화현의 물줄기는 북녘의 백두대간 무산(해발 1320)에서 길떠나는 서화 천(인북천)을 말함이니 소양강의 으뜸 발원이며, 기린현의 여울은 오대산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오르는 내린천을 일컫는 말이다. 북천과 한계천을 아우른 서화천이 내린천과 살을 섞어 미륵천을 이루는 곳이 인제의 합강리(合江里). 그 두물머리에는 '놀기 좋기는 합강정, 넘기 좋기는 거니 고개(홍천군 두촌면)'라는 노랫말로 등장하는 합강정(合江亭)이 아름답고 그 아래 돌미륵 한 기가 서 있다. 옛날 어떤 나무꾼의 꿈에 현몽하여 물 속에서 건져냈다 는 전설을 품은 미륵인데 행여 미륵천의 이름과 남남이 아닌 듯도 싶지만, 마을에 전해오는 구전이 옳다면 대략 300년 전쯤에 소양강 목상이 조성한 것이라 하여 미륵천과는 무관한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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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강에 또한 전해오기를 서화천은 숫물(雄水)이요 내린천은 암물(雌水)이라 하여 암물이 흐리면 홍수가 나고 숫물이 맑으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그런 물점()의 풍습이야 으레 그 여울에 걸린 마을끼리의 유세 다툼으로 시작되는 법이지만 종당에는 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여인 홀대의 유형으로 결론에 닿는다. 합강 조금 윗목에는 낯선 이름의 먼 이국 여인이 세웠다는 다리가 하나 걸렸으니 이름하여 '리빙스톤교'. 한국전쟁 때에, 미국 중령 리빙스톤의 군대가 북군의 공격에 쫓겨 강을 건너다가 때마침 홍수로 불어난 강물로 말미암아 숱한 이가 다치고 죽었다. 리빙스톤 대령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내가 이 곳에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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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의 전설이 깃든 한계(寒溪)


인제 읍에서 설악의 들목으로 만나는 원통(元通)은 본래 원통역(圓通驛)이 그 근원인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이름 내력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흔히 우스갯소리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고 한다. 어떤 이는 한 임금이 설악에 파천(播遷)하여 도성으로 차사를 띄울 적에 매양 돌아오지 않으므로 생겨난 말이라 하나 그리 따를만한 전설은 아니다. 한계령 길을 함께 떠난 서화 중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이대건(38) 선생은 첩첩산중 휴전선 근처로 배속받은 군인들 사이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했다.

명산이란 본래 유람에나 좋은 땅이지 터를 두고 살기에는 불편한 곳이다. 탈속의 나그네야 더없이 즐거운 설악의 풍광이지만 생계를 작정으로 산중에 깃든 민생들의 호구지책이야 논밭 한 뙈기가 마뜩찮은 명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듯 사는 일이 내내 고단하였지만 그래도 명산 그늘이라고 한껏 멋을 부린 이름이 바로 한계 마을이다. 한계는 풍진 영화를 한낮 베옷 품에 감추고 세속를 떠나던 마의태자의 전설이 곳곳에 서린 곳이다. 「신라김씨대종원」의 기록에는 '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 10월 하순이고, 한계에 닿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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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길과 미시령 길은 한계리 재내(瓦川) 마을에서 갈린다. 옛날에 기와를 구워 사람들이 줄지어 날랐다는 내력으로 얻은 이름이다. 재내에 사는 홍기주(65)옹은 내설악의 고갯길과 더불어 늙어온 사람이다. 지금의 한계령이야 소문도 부산한 관광길이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는 그저 사람 하나 걷기에 맞춤한 잎새 우거진 오솔길이었다. 1971, 군장비로 고갯길을 뚫고 한계의 지명을 따라 새로 붙였다는 한계령의 이름에 대하여 물었더니, "웬걸, 우리 에려서 왜정 때두 그렇게 부른 걸" 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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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라령과 오색령, 그리고 한계령


그러나 '왜정 때'도 불렀다는 그 한계령이 좀처럼 옛 글에는 보이질 않는다. 다만 한계는 옛 이름이되 한계령은 그리 오래 묵은 옛 이름이 아닌 탓이다. 한계령의 본명으로 유력하게 들먹이는 이름이 소동라령과 오색령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 편에는 소동라령에 대하여,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산줄기가 겹치고 포개져 지세가 험하고 궁벽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없 어졌다"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여지고」의 양양 편에는 "오색령은 인제의 영로이며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는 중종 25(1530) 무렵은 소동라령이란 이름으로 부르던 한계령 길이 너무 험하다는 이유로 폐하고 이미 미시령 길을 새로 개척한 다음이다. 조선시대 초엽까지 한양 길로 삼았던 소동라령이 풀숲에 묻히면서 점차 그 쓰임새를 잃고 마는 것이다. 다만 같은 책에 실린 남대천의 설명으로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오며 소동라령의 물과 합쳐 부의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 간다"는 대목을 보면 적어도 소동라령이 지금의 한계령 길을 의미하고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훗날 『동국여지승람』의 근간이 되는 『세종실록지리지』 (1454) 양양도호부 편 역시 소동라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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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이전의 문헌이 오직 소동라령을 고집하는 반면, 조선시대 말엽에 간행되는 문헌에는 오색령의 출현이 두드러진다. 『여지도서』(1760), 『대동여지도』(1861), 『증보문헌비고』(1908) 같은 기록에는 모두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는 분명 오색약수를 비롯한 명승을 탐방 하는 길과 관련된 이름일 터이다. 이미 오래 전에 흔적을 잃은 소동라령의 존재는 잊혀지고 남설악으로 통하는 고갯길에 대한 새 이름으로 오색령이 등장한 것이다. 다만 오색령과 소동라령이 더불어 쓰인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얼핏 신뢰성을 잃고 있다. 왜냐하면, "소동라령, 조침령, 구룡령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 는 길"이라고 쓴 것은 틀림없이 어림에 의한 오기(誤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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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의 고개 조침령과 박달령


이문구의 소설『매월당 김시습』에는 설악산 관음암(오세암)에 머물던 김시습과 양양의 관기(官妓) 소동라의 정분이 등장한다. 소동라는, 한양에서 소동라령을 넘어오는 길손은 무릇 자신의 수발을 받아야만 양양 땅을 밟았다 하리라고 지은 기생의 이름이다. 어차피 소설이란 작가의 허구이니 오세암의 김시습과 소동라령은 논픽션이고 여인 소동라는 픽션이다.

소동라령은 한동안 오색령이라는 반쪽의 이름으로 쓰이다가 국도가 넘어가는 오늘날에는 또 다른 반쪽의 이름인 한계령으로 소통되는 운명을 지녔다. 옛날처럼 다시 서울길이 열렸으니 소동라령으로 돌아가면 되겠지만 그도 한 세월에 하릴없이 되는 일은 아니다. 정작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한계와 오색은 그저 내리막 길 양쪽에 걸린 땅이름에 다름 아니지만 부르기에 따라 한쪽은 소외(疏外)로 여기는 일이 고개 이름에는 흔하다. 고개 또한 사람의 생리를 닮아 한쪽 이름만 부르면 또 한쪽은 냉큼 토라져 돌아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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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로가 소동라령에서 미시령으로 옮겨간 다음부터 개화기 무렵까지 근동의 민초들이 내린천 물길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고개는 조침령과 박달령(단목 령)이다. 조침령은 양양의 서림에서 인제의 기린으로 넘는 고개인데 본래 옛길을 피해 엉뚱한 곳에 새로 흙먼지 길을 닦고 지명비를 세웠다. 박달령은 오색의 들 목에서 인제의 으뜸 오지 진동리로 넘는 고개이니 고려 고종 4년에 김취려 장군 이 충북의 제천에서부터 추격한 글안족을 마지막으로 섬멸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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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닦은 조침령 길도 아직은 쉽게 넘기 어렵고 박달령은 여전히 풀숲에 가려 변함없이 등산객이나 산꾼들의 길로만 남았다. 옛길로는 그 중에도 특히 조침령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게 인근 노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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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고갯마루 꽃눈은 내리고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한계령 들머리에는 때아닌 북새통이 벌어진다. 자동차 바퀴에 쇠사슬을 감는 풍경이다. 미처 쇠사슬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불안한 눈길로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그럴 즈음이면 금세 약삭빠른 쇠사슬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즉석에서 돈과 쇠사슬이 오가기도 한다. 그들은 쇠사슬 감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대신 감아주곤 하 는데 물론 장사꾼이니 공짜는 없다.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고갯길 넘는 데는 이력이 난 팔자라고 자발없이 덤비다간 아무래도 큰 낭패를 당할 지경이다. 날만 좋다면 한 시간이면 거뜬히 넘는 길을 보통 서너 시간씩 걸려 넘어오는 사람들도 자동차도 모두 생난리를 치른 몰골이 다. 더러 불도저 같은 눈차도 지나가고 모래를 실은 트럭들이 연방 모래를 뿌려 대지만 퍼붓는 눈보라를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기왕 설악에 왔으니 한계산성이나 대승폭포 정도를 골라 겨울 산행을 하리라던 계획은 애시당초 글러 먹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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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령 정상은 참으로 장엄하였다. 여느 날에도 거기 으레 저 아래 두고 온 풍 진 사바가 한낱 티끌처럼 부질없는 곳이지만, 시방에 눈이 내려 천지가 그윽한 날에 굳이 사람의 정한을 추억하여 무엇하겠는가. 하늘도 땅도 때로는 저렇게 경계를 허물어 본래 세상의 모든 있음과 없음이 다 거짓임을 법문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를 버리고 ''를 따라 헤매던 날들 도무지 부질없어라. 이제 알았다고 ''는 또 저 눈보라 속에 던져두고 빈 그림자 ''를 따라 슬금슬금 집으로 돌 아가는 ''의 한계령아
!

다섯 빛깔 전설의 땅, 오색(五色)


한계령이라 부르니 그저 서운한 땅이 바로 남설악의 오색이다. 소동라령을 한양 길로 삼았던 시절에는 오색역(五色驛)이 있었다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지금은 없어졌다'는 간략한 기록으로 남는다. 역로는 비록 끊어졌지만 남설악의 절경에 앞장을 서는 오색의 명성이 사람 발길을 끊임없이 불러들여 예나 지금 이나 인파가 모박이를 하는 곳이다. 호사스런 건물을 줄지어 지어놓고 아예 마을 하나가 몽땅 관광으로 밥을 먹고 산다.

오색에서는 그저 모든 것이 다섯이다. 신통하게도 골물이 흐르는 골짜기 너럭바위에서 솟아나는 오색약수 역시 그 맛이 다섯이라 하고, 보물 제 497호 삼층석탑 이 남아 있는 성국사터의 다른 이름 또한 돌빛마저 다섯 빛깔을 낸다하여 오색 석사(五色石寺). '다섯 전설'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다섯 빛깔의 꽃이 핀다는 오색화(五色花) 전설이다. 오색이란 마을 이름도 다섯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937년 양양의 전 재우 군수가 세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해방 무렵까지도 지금의 관터 마을 앞의 길턱에 있었던 세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도 곳곳에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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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희고, 푸른 삼색화 꽃나무를 어려서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고경재(66, 양양 문화원장)) 선생은 오색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색 마을의 양경수(76) 옹을 만나보라고 했다. 옹의 집은 오색 종점에서 차표와 잡화를 함께 파는 차부(車部) 집이다. 설악에 머무는 동안 옹의 집으로 삼고초려(?)를 감행했지만 끝내 옹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볼일이 있어 읍내에 갔다고 하고, 또 어떤 날은 읍내에서 술에 취해 돌아와 자는 중이라고 했다. 한계령을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들러 보니 역시 옹은 취중이었다. 그만하면 들을 건 대충 들은 셈이라고 발길을 돌리는데 문득 내리는 눈이 수상하다. 아뿔싸! 오색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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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설악에서 보낸 닷새의 변()


설악에 머무는 닷새 동안 내내 신흥사에는 눈이 내렸다. 방학을 맞은 아내와 젖 먹이 남매를 데리고 절방에 들었으니 밤이면 유독 야제(夜啼) 심한 어린것들의 울음소리도 그렇거니와, 입정(入靜)의 납자들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더듬는 사 이 아파트에서만 자라 문풍지 우는 소리에도 지레 눈을 뜨는 어린것들의 아비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새면 아비는 날마다 한계령으로 가고 저물어 돌아올 때 까지 어린것들의 어미는 생면부지의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여염의 손주가 그리운 후원의 관음행 보살은 떡이며 과일 같은 법당의 퇴물을 틈만 나면 객실로 날랐지만 피자 맛이 그리운 어린것들은 허튼 눈길 한번 주지 않더란다. 신흥사 청정 비구 정념(正念)이 면벽한지 8년인가 9년만에 찾아왔다는 폭설이 80년인가 90년쯤 묵은 노송의 우듬지를 꺾는 밤, 아비는 끝내 연욕 (煙慾)을 참지 못하여 해우소 근처에다 향공양을 올리면서 마침내 퇴속을 결심하였다. 금번 세상을 만난 이래 가장 비굴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면서 그래도 산을 내려갈 때는 한마디쯤 하고 가는 법이라고, 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왈, 백년송 천 년풍(百年松 千年風).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2월호)

 

 

[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미시령 ]

설악과 금강을 나누는 고개, '미시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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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국도에 다시 눈이 내린다. 외설악의 설악동 들머리를 지날 무렵 동쪽 바다에 내리는 눈송이마다 어둑스레한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바다는 그저 죽은 듯이 낮게 엎드려 검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속엣 것을 토해내듯 고통스럽게 몸을 뒤챘다. 문득 박성룡의 시 '바다는 지금 그의 궤도를 벗어나려는 지구의 괴로운 바로 그 몸부림'이란 구절이 생각났다. 왜 �금없이 그런 시가 떠올랐을까. 참으로 아득한 곳에서 멀리 달려온 것을, 정작 바다에 닿지 못하는 눈송이처럼 행여 오늘은 저 바다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멀미를 하는가.
'
아무래도 바다 어딘가가 아프다.'

날이 저물어 절집으로 가려는 발길을 슬그머니 꼬드겨 바다가 가까운 포구로 갔다. 속초(束草) 들목 대포항(大浦港). 헐값에 방을 내준 민박집 할머니는 "시방 난리두 요런 난리가 �다"면서 한창 금새 좋던 시절을 마냥 그리워했다. 일제 시대 의 대포는 동해의 포구 가운데 손가락을 꼽을 만큼 컸다. 속초항이 열리고 횟집 촌으로 팔자를 바꾼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바야흐로 나라 살림이 결딴이 난 터라 횟집도 민박도 그저 스산하다. 그깟 돈 몇 푼에 기죽지 말자고 비릿한 갯내음을 다독이며 방파제로 나가 보았지만 포 구의 불빛도 왠지 예전의 밝음을 잃었다. 지금 바다가 많이 아프다.

속초, '눈꽃 축제'는 열리고

옛날의 속초는 다만 양양도호부를 따르는 작은 어촌이었다. 조선 시대 청초호(靑 草湖)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두어 일찍이 쓰인 바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영화는 속초항이 개발되는 일제 시대 무렵부터가 그 시작이다. 산천 또한 명산 설악을 등에 업고 창창한 동해 바다를 더불었으니 더 아쉬울 게 없고, 아래위로 청초와 영랑같은 호수까지 거느렸으니 더 부러울 게 없는 곳이다. 나라에서 살기 좋은 곳을 꼽을 적에 경주, 김천과 더불어 으레 차례를 다툰다.

속초의 이름 내력에는 몇몇 전설이 뒤얽혀 있다. 바다에 나가 영금정(靈琴亭)의 솔산을 바라보면 소나무와 풀을 묶어 놓은 꼴이라 하기도 하고, 풍수의 눈으로 보면 지형이 소가 누운 형국이라 풀을 뜯어먹기 좋게 묶어주어야 했다고도 한다. 설악의 울산 바위와 함께 얽힌 이야기는 한층 전설답다. 울산의 수령이 자기 고을의 바위라 하여 해마다 울산 바위에 대한 세금을 받아갔는데 신흥사의 한 동자승이 꾀를 내어 이젠 소용없으니 도로 가져가라 했단다. 울산의 수령도 지지 않고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 가마고 맞장단을 쳤다. 동자승은 속초 땅에 지천으로 널린 속새 풀로 새끼를 꼬아 바위를 묶고 불에 태웠다. 속초의 이름 또한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연구로는, 속초 역시 속새 풀과 관련되어 나라 산천에 흔하게 널린 '속사'라는 이름과 다를 바 없는 지명이란 게 거의 정설이다. 평창의 용평이나 휴전선 북쪽의 지명에 유달리 많은 속사라는 지명은 한결같이 속새(덕욱새) 풀이 잔뜩 우거진 탓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속초시지』에는 속초를 그저 속새로 불렀음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아직 더러 속초에 남아 산다고 했다.

포구의 물회로 아침을 먹고 청초호를 돌아 속초 시내로 들어갔다. 속초의 거리에는 올해로 세 번째가 되었다는 '설악눈꽃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한창 손님을 맞고 있었다. 미시령 가는 길에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여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안내 책자를 하나 얻어보니 오늘은 팽이치기를 하는 날이란다. 나흘 동안의 축제는 연날리기, 눈사람 만들기, 팔씨름, 하얀 산길 걷기, 빙벽 오르기 같은 것들로 짜여져 있다. 으레 '콩쿠르' '미인 대회'가 고작인 여느 축제와는 달리 '설악눈 꽃축제'는 아주 정감어린 놀이판이다. 아름답게 빚어놓은 눈조각 사이를 거닐면 서 그만 아침 햇살을 다 써 버렸다.

미시령 고개의 들머리 원암(元岩)

속초의 모든 도로 표지판은 한결같이 미시령으로 통한다. 행여 처음 가는 이라도 미시령 찾는 일만은 좀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 눈꽃축제가 열리는 종합운동장에서 울산바위 아래로 미시령 길을 접어들면 금세 속초시 노학동의 학사평(鶴沙坪) 과 고성군 토성면(土城面)의 원암리가 나뉜다. 학사평은 본래 '딱사벌'이라 하여 도무지 농사가 잘 안되는 딱한 들판이라 얻은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고, 원암은 조선 시대 원암역(元岩驛)이 그 근원이니 아마도 울산바위에서 따온 이름일 터이다.

지금의 원암은 설악의 '콘도' 마을이 되어 버렸다. 대충 몇 개 유명한 콘도의 객실만 합쳐도 그 수가 무려 1300여 개가 넘는다. 콘도 역시 나그네가 잠시 와 묵어 가는 곳이니 원암 땅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고개 아래 마을이란 으레 오가는 이들의 잠자리가 되기 마련이지만 옛날의 역이나 지금의 콘도나 여느 민생들의 푼수로는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고 보면, 그 땅에 보통의 백성으로 사는 일이 그제나 이제나 왜 아니 어려우랴. 역이 들면 관리가 오고, 관리가 오면 민생이 고달프고, 콘도가 서면 행세가 오고, 행세가 오면 촌놈은 그저 늘 풀이 죽는 법.

원암이여! 그러나 노여워하지 말라. 무릇 세상의 수많은 발품이 거기 허름한 그대의 구들로 밤이슬을 피하고, 거기 깔깔한 그대의 피죽으로 허기를 달랬으니, 슬 퍼하지 말라 원암이여! 아주 많은 이들이 늘 그대 품의 하룻밤을 잊지 않고 여태 추억하는 것을. 원암이여! 그리하여 부디 울지 말라. 때로 그대를 홀로 남겨두고 그 모든 길들이 총총히 떠나간다 하여도. 세상의 길이란 게 본시 두고 가는 일보다 보내고 남는 일로 말미암아 더욱 길다워지는 것을 그대가 어찌 모르랴마는.

조선 중기 양양, 간성의 나랏길

미시령 길이 역로(驛路)가 되는 내력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 편에는 " 고을 서남쪽 80리쯤에 있다. 길이 있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하였고,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저술인 『수성지(水城 誌)』에는 "옛날에 소로가 있었으나 없어져 지금은 행인이 없다. 계축년에 양양부에서 소라령(所羅嶺)이 좁고 험한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어 양양, 간성 양읍의 관로(官路)로 하였다."고 적었다.

무렵에, 한양에서 관동으로 통하는 길은 원주를 지나 대관령을 넘는 길이 '큰길' 이고, 경기도 양평 땅인 지평(砥平)에서 큰길과 갈라져 홍천과 인제를 지나 설악산을 넘는 길이 '작은 길'이었다. 큰길은 강릉과 삼척을 지나 남쪽의 평해에 이르렀고 작은 길은 북쪽의 양양과 간성이 그 목적지였다. 그 작은 길이 인제에 닿아, 원통역과 신원을 지나 오색역으로 넘는 소동라령 길을 버리고 인제 북쪽의 남교역(嵐校驛)을 지나 원암역에 이르는 미시령으로 길을 바꾼 것이 바로 성종 24(1493)년의 일이다.

『수성지』에 또 이르기를, "원암역은 군 남서쪽 60리에 있는데 미시파령(彌矢坡 嶺) 입구에 처음 개설했다가, 양양의 오색역으로 옮겼다가 다시 상운역(祥雲驛)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성종 24년에 미시령으로 옮긴 역로를 훗날 소동라령으로 다시 옮겼다가 종당에는 해안을 따라 강릉으로 통하는 상운역으로 옮겨 갔다는 얘기다. 『수성지』는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부임한 이듬해의 저술이니 적어도 1632년 이전에 이미 미시령은 역로의 쓰임새를 잃고 다시 풀숲에 묻히는 신세가 되는 모양이다.

미시령의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岩寺)'

속초에서 바라보면 미시령 길은 내내 울산 바위와 함께 오른다. 태초에 조화옹 (造化翁)이 금강산을 빚을 적에 울산에서 금강을 향해 가다 그만 설악에서 멈추었다는 바위. 옛이름은 천후산(天吼山)이니 이름 그대로 '하늘이 우는 산'이다. 울타리를 두른 듯 10리나 된다 하여 울산(鬱山)이라는 말도 있지만 벼락치고 천둥 우는 여름이면 마치 하늘이 우는 듯 산이 우는 까닭에 울산(吼山)이라 하였음이 옳다. 발음이 같기로 경상도 땅 울산을 불러다가 꾸민 전설이야 아마 그리 오래 묵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미시령 길을 사이에 두고 울산 바위 건너편에는 또 수암이라는 바위가 솟아 있다. 옛글에는 수암(水岩)이고 지금 글에는 수암(秀岩)이다. 웅장함은 비록 울산바위에 견줄 바 아니지만 수암 또한 예사로운 생김은 아니다. 금강산 화암사는 바로 그 수암 아래터를 잡은 지 이미 천년이 넘은 옛절이다. 택당의 글에는 절이 수암 아래 있어 그렇게 부른다 하였는데 본래 신라 혜공왕 5 (769) 율사 진표의 창건이다.

화암사가 그 모산(母山)을 설악산에 두지 않고 금강산을 따르는 까닭은 '미시령 북쪽은 금강'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영주의 부석사가 비록 소백산에 있으나 '고치령 동쪽은 태백'이라 하여 '태백산 부석사'로 쓰는 것과 같다. 미시령 길에서 5리 남짓한 화암사는 그러나 거의 옛 모습을 잃었다. 일주문에서부 터 법당과 요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 건물 아닌 것이 없고 다만 골물 위에 놓인 돌다리와 법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더러 희미한 옛 빛이 남았을 뿐이다.

『수성 지』는 화암사가 겪었던 수난의 기록을 대를 물려가며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멀리는 광해군 14(1622)에 불길이 일었고, 가깝게는 철종 11(1860)에 흡곡( )에서부터 강릉, 정선에 이르는 큰 불길에 휩싸여 화암사 역시 잿더미가 되었다. 산도 옮기고 바다도 바꾸는 현대의 문명으로도 불과 몇 해 전 큰 산불을 당했을 때 그저 속수무책이던 기억이고 보면, 예전의 산불이야 그만한 재앙이 더는 없었을 터이다.

겨울이면 맨 먼저 끊기는 고개

큰 눈 내린 지가 이미 달포는 지났는데 미시령에는 아직도 폭설의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고갯마루 휴게소에는 자동차 한 대 겨우 들고 날 정도의 길만 빼고는 마치 본래부터 그렇게 생긴 설산(雪山)의 협곡이라도 있었던 듯 어른 키보다 높게 흰 눈이 쌓여 통문(通門)을 이루고 있었다. 전에도 더러 눈 내리는 미시령을 넘은 적이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쌓인 눈은 이 번이 처음이다.

미시령 길은 한계령이나 진부령과는 달리 폭이 좁고 비탈이 심하여 지금도 겨울 이면 으레 서너 번씩 길이 끊긴다. 『수성지』에도 한 해에 대개 네댓 명이 목숨을 잃고 열 마리 정도의 말이 죽는다고 했다. 선조 27(1594)에는 관리 열 사람이 눈사태에 깔려 죽었고, 인조 9(1631)에는 눈 속에 묻힌 군인 서른 명을 가까스로 구했다고 적었다. 눈 쌓인 고갯길을 무리하여 넘을 적에는 항상 산마루를 살펴야 한단다. 눈덩이가 계란처럼 뭉쳐 굴러 내리기 시작하면 이미 눈사태의 조짐이다. 그러나 눈사태의 기미를 미리 알았다 해도, 또는 용케 앞으로 달려나가 눈무더기를 피했다 해도 이미 사태를 만나면 목숨 보전이 어렵다고 한다.

휴게소에서 당귀차 한 잔을 호호 불면서 도적 폭포 길을 물으니 모두들 정신 나간 사람 대하듯 눈을 치켜 뜬다. 휴게소 한 켠에서 목판에 불그림을 그리던 총각인 듯한 사내는 아예 인두를 내려놓고 다가와 "눈은 1m밖에 안 왔지만 골짝 안 에는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른다"며 아예 내려갈 꿈도 꾸지 말란다. 미시령 고갯마루에서 불과 서너 구비 아래 골짜기에 걸린 도적 폭포는 옛날 미시령의 도적들이 오가는 이들의 재물을 빼앗고 빠뜨려 죽였다는 곳이다. 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허리춤까지 쌓인 눈도 눈이지만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깎아지른 벼랑이다. 길을 돌아 도적 폭포 산장 쪽으로 가 보니 그 곳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폭설 에 묻혀 운신이 어려운 트럭 한 대가 서있는 폭포 들머리에서 한참 동안 그저 입만 헤 벌리고 섰다가 미련을 버리고 돌아섰다.

미시령은 고개 중의 별종(別種)

미시령은 참 이름도 많다. 그 중에도 오래인 기록의 이름은 『신증동국 여지승람』의 미시파령이고 오늘날은 다만 미시령으로 통한다. 5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또 무슨 까닭으로 미시파령이 미시령에 이르렀는지 알 길은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르기에 크게 다름이 없으니 다만 미시령은 아직도 본명을 따르는 셈이다. 어떤 이는 농담 삼아 미시파령(彌時坡嶺)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개'라 하는데 그도 어차피 뜬구름 잡는 일에 다름 아니다.

도적 폭포에서 진부령 길이 시작되는 용대 마을의 '바람도리'까지는 10리 남짓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옛 글에 "동류동해(東流東海) 서류서해(西流西海)"라 하였다. 말 그대로 미시령 동쪽의 물은 동해로 가고 서쪽의 물은 서해로 간다는 뜻이다. 고갯마루에서 서쪽으로 운명을 바꾸어 도적 폭포로 떨어지는 골 물은 장차 소양강이 되고 북한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간다. 미시령 동쪽의 물이 불과 30리 어름에서 동해와 만나는 일에 견주면 물경 천리 길의 절반이 넘는 머나먼 여정이다.

백두대간의 고개로 걸려 매칼없이 녹록한 고개가 몇이나 되랴마는 미시령은 유독 깐깐하고 쟁쟁하다. 굳이 초목의 생리를 따른다면, 비록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결코 휘지는 않는 대쪽같은 성정을 품었다. 그런 품성은 늘 밖으로는 모가 나되 안으로 둥글고, 겉으로는 거칠되 그 속내가 뜻밖으로 여리다. 산천에 그런 고개 하나쯤 걸려 무릇 전범(典範)을 업수이 여기는 바 있다 해도 별다른 뒷탈은 없다. 행여 미시령에 가거들랑 여느 세상에서 쓰던 마음은 단단히 동여매고 허튼 상식의 문은 아예 닫아 거는 게 편하다. 그러나 상피와는 멀다. 미시령은 아무래도 꽤 아름다운 별종일 뿐.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