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개생가로 가는 길이 있지만 잡초가 무성합니다.2시간 더 가도 논가 생가 가는 길이 또 있읍니다.
▽ 영취산을 지나 또 나오는 산죽길,,아주 길게 이어집니다.
▽ 서상 방면의 마을,,육십령 터널을 지나는 경부 고속도로가 보이고, 우측산이 덕운봉.
▽ 가야 할 대간과 덕유산
▽ 전망이 좋은 바위
▽ 왼쪽에 오동제 저수지,,논개생가인 장수 마을 전경
▽ 논개 생가 가는 이정표,육십령이 6.5km남아 있군요
▽ 논개생가 가는 길 전경,,,잡풀이 무성합니다.
▽ 깃대봉 가는 왼쪽에 있는 북바위 입니다.장수 쪽 전경이 아주 좋은 곳,,
뒤에 40여명의 산악팀이 몰려오고,,,빨리 가자,,
▽ 깃대봉과 그 앞에 억새 군락지가 보입니다.
▽ 억새와 깃대봉
▽ 민령(민재?) 인가 봅니다. 800미터 가면 임도가 있다고 합니다.
▽ 쉬고 계시는 처형과 마눌
▽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그러나 뜨거운 햇살로 고문을 받고 있는 중,,,
▽ 깃대봉입니다.
▽ 덕유산 방향,,덕유산은 바로 왼쪽에 있읍니다.
▽ 지나온 대간을 바라보며
깃대봉~육십령 <14;30 ~ 15;30>1시간 5분
깃대봉에서 좌측으로 대간은 이어집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안부를 지나 작은 구릉을 넘어 내려가니
깃대봉 샘터가 나옵니다.깃대봉에서 10분 거리입니다.
물 맛이 아주 갑칠납니다.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딱으니 정신이 번쩍납니다.
좀 지나니 맨발등산로가 나오고,,
내려 가면 얼마 가지 않아 육십령이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그러나,,
대간이 쉽게 호락호락 쉬이 보내 주겠읍니까,,
이번에도 마지막 길은 아주 길게 길게 이어지더군요.
크게 오르락 내리락은 하지 않지만 고만 고만한 높이로
아주 길게 이어지던 대간 길이 깃대봉에서 1시간을 채우고 끝이 납니다.
화장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어수선한 분위기,
그 옆에 깃대봉 등산 안내도가 있고 그 오른쪽에 휴게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차를 세워둔 장수 방면의 휴게소는 왼쪽으로 좀 올라가야 합니다.
처형과 마눌은 함양 방면 휴게소에 남겨두고 장수 휴게소에 가서
차량을 회수한 후 국수 한그릇을 비우고,,,
구미팀을 만나고 가려 했는데,,
진행 속도로 봐서는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지를 않습니다.
40여명이나 되는 대간팀에 막혀 늦어 지나??
차로 한바퀴 돌아 보고,,
아쉽지만 갈 길이 멀어 집으로 출발합니다.
집으로 오는 고속도로는 도로통행료를 내기도 아까울 정도로 막힙니다.
아마도 추석 한가위 벌초 차량들이 많은가 봅니다.
대간 다니는 것 보다 막힌 차량으로 더 힘들었던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오후 4시 경 출발하여 쉬지 않고 왔는데도 오후 10시가 다 되어 도착합니다.
어휴 ~힘들다.
▽ 덕유산이 또렷이 보이는군요.
▽ 깃대봉 샘터,,물맛이 아주 차고 맛있읍니다.
▽ 편안한 등로
▽ 육십령 날머리에서 등산안내도 바로 오른쪽에는 화장실,,
▽ 육십령 함양 방향 휴게소에서,,도로를 건너 저 위로 올라가면 덕유 올라가는 들머리가 있읍니다.
그 들머리 앞에 장수 방향 휴게소가 바로 앞에 있고,,
▽덕유산 들머리 앞에서
▽ 덕유산 들머리에 있는 장수 방향 휴게소,,그리고 오른쪽에 육십령루
중재 ~ 육십령 산행 참고 사항
1.지나온 대간길 훤히 잘 보이는 곳,전망이 좋은 곳이 많아
볼 것이 많은 구간입니다.
남으로는 지리산 능선,북으로 덕유산까지 보입니다.
특히 백운산 가기 전,백운산에서의 전망,북바위 등의
전망이 좋음
2.표지기가 필요한 부분에 적당히 있어 진행하기엔 큰 무리 없음.
-백운산에서 대간길은 좌측으로 이어짐
-영취산에서 대간길은 직진 (왼쪽은 금남호남정맥길)
-깃대봉에서 왼쪽길 (표지기가 많아 별 무리 없음)
3.별 위험한 곳,어려운 곳은 없었음
-백운산 정상 바로 지나서,,영취산 좀 지나 키가 큰 산죽길
4.중기마을에서 중재까지는 30분 거리(널널한 걸음으로,,)
5.육십령에서 중재까지 택시 : 25,000 (함양서상택시 055-963-0094)
6.중간 탈출로
-무령고개 : 영취산에서 15분 거리라고 함
-논개생가 : 영취산에서 깃대봉 방향으로 약 30분,2시간 거리에
왼쪽으로 논개생가 (미확인)
-육십령에서 1시간반 거리에서 민령(민재?)에서 800미터가면
임도가 있다고 함
7.식수 : 깃대봉에서 10분 거리의 깃대봉 샘터,
중기마을 민박집,육십령 휴게소
8.화장실,식사 : 휴게소 이용
함양 방향 휴게소 : 깃대봉에서 육십령 날머리에 있음
장수 방향 휴게소 : 육십령에서 덕유산 들머리에 있음
산행 기타 사항
○ 교통 : 자가용 이용 (왕복 540km)
영동à경부à대전통영à서상ICà(좌회전)26번 국도
○ 경비 : 약 13만원
유류비(약 8만원) + 톨게이트비(24,000) + 택시비 25,000
+ 기타
○ 준비물
물 ; 약 3.8리터
(1.8리터 + 1리터 1병 + 1.8리터 이온 음료수)
먹거리 ; 점식
간식거리 ; 초콜릿 + 과자 약간 + 사과 2 + 오이 2
휴대품 ; 모자,수건,스틱1조
지도(1;50,000 조선일보 백두대간 제공)
비상용 물품 ; 비상약품(대일밴드)
기타 ; 옷여유분(등산상의 각1벌),헤드렌턴2
디카+건전지 여유분(핸폰,카메라,헤드렌턴)
알고가기 !!!
백운산(1,278.6m 경남 함양군 백전면 서상면, 전북 장수군 반암면)
백운산(白雲山)은 우리나라 산이름 중에 흔한 편에 속한다.1,000m급 이상만 살펴보더라도 원성의 백운산(1,087m) 무주의 백운산(1,123m) 정선 고한의 백운산(1,426m) 광양의 백운산(1,217.8m) 함양의 백운산(1,278.6m 경남 함양군 백전면 서상면, 전북 장수군 반암면)이 있다.
가장 높은 정선 고한의 백운산은 함백산의 줄기라 독립봉으로 보기 어렵고 원성 무주의 백운산은 높이에서의 열세 탓인지 이름을 크게 떨치지 못하고 있다. 광양의 백운산은 고로쇠 약수가 제철인 우수 경칩과 더불어 부산지역 신문의 등산안내란에 연달아 이름이 실릴 정도로 유명하고 특히 이 산 정상에서는 지리 주능선과 연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힘차게 이어져 우리들의 마음을 사뭇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함양 백운산은 산의 놓임새에 있어서 다른 백운산을 압도한다. 지리산에서 끝나는 백두대간의 막바지에 치솟아 북의 육십령(六十嶺 734m)과 남의 팔랑치(八良峙 553m)를 이어준다. 육십령은 남으로 달려오던 백두대간이 북덕유~남덕유를 거쳐 이 곳에서 한 번 숨을 죽이고 팔랑치 역시 백운산 ~ 봉화산을 거쳐온 백두대간이 여기서 한 번 숨을 가다듬고는 지리의 멧줄기를 치솟기 위해 용틀임하는 고개이다.
백두대간의 막바지 줄기인 함양 백운산의 정상에 서면 남덕유와 북덕유가 쏟아질 듯이 기세 드높게 치솟았고 멀리 남쪽엔 지리의 주능선이 가로로 길게 누운채 하봉 천왕봉에서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등의 자태가 구름과 더불어 하늘을 꾸민다. 덕유가 풍기는 거세고 치열한 아름다움과 지리가 전해주는 풍만한 곡선 및 장중한 너그러움은 상반된 모양으로 북과 남에서 달려와 백운의 정상에서 만나 우리들을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다. 한반도 진면목 중의 한 부분이 가슴에 깊게 깊게 새겨진다.(경남일보 퍼옴)
우리가 산경표를 알아야 하고 교과서에 실리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지리인식과 역사인식, 그리고 문화인식을 올바르게 확립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산경표는 억지로 짜 맞춘 산맥개념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우리 나라 지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산경표, 즉 백두대간과 함께 얽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립 장군이 왜 문경 새재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또한 삼국시대 신라의 국경이 왜 일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지의 해답을 백두대간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말씨와 세시 풍습, 음식 맛도 산경표의 경계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산경표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운산군에서 다시금 산경표의 소중함을 논하는 것은 이 구간 영취산에서 대간이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그리고 금남정맥 등 3개의 정맥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산경표를 보면 백두대간은 덕유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기에 앞서 육십령을 지나 해발 1,076m의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분기하는 것으로 돼 있다. 대간은 영취산에서 새로운 가지를 쳐 백운산과 마주한 장안산과 장수 팔공산, 진안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에 이르기까지 금남호남정맥을 만들어 낸다. 금남호남정맥은 또 주화산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갈린다. 호남 땅을 달리는 호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을 거쳐 광양의 백운산에서 숨을 멈춘다. 반면 금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대둔산과 계룡산을 거쳐 부여의 부소산에서 끝맺음을 한다. 두 갈래로 흩어진 정맥은 다시 지맥으로 가지를 쳐 호남정맥은 백두대간과 어우러져 섬진강을 만들고 금남정맥은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 금북정맥을 울타리 삼아 금강을 빚어낸다. 또 호남정맥은 호남 땅을 동서로 나누면서 서쪽으로 만경, 동진, 영산강을 빚어내면서 특유의 들판문화를 잉태하게 한다. 충청과 호남의 땅과 물을 가르는 역사적인 출발점이 바로 백운산군 영취산이 되는 것이다.
(중략)
이곳 영취산 정상이 바로 삼파수의 정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취산 정상이 낙동강(남강), 섬진강, 금강 등 3개의 큰 물줄기로 나누어지는 분수점이 된다는 것이다. 백두대간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경호강,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들어가고, 남서쪽, 즉 대간과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사이로 흐르는 물은 요천을 거쳐 남원을 관통해 섬진강이 되는데 반해 영취산 북서쪽으로 흐른 물줄기는 논개 생가 앞 하천을 지나 대청호로 가 금강으로 유입된다.
주논개(1573~1593)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 6만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육십령
예로부터 한양을 중심으로 부산까지는 영남대로가, 호남지방으로는 호남대로가, 삼남지방으로는 삼남대로가 잘 발달돼 있었는데 육십령은 바로 삼남대로 구간 중 가장 큰 고갯길이었다.
고갯마루에 산적이 하도 많아서 함부로 고개를 넘지 못하고 산아래 주막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육십명의 장정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넘어야 했다는 육십령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당시 장정들이 모인 주막 촌은 군장동(群壯洞), 그리고 산적들을 피해 살았다는 피적래(避賊來)란 마을이 아직도 있을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안의 감영에서 육십령까지 거리가 육십리고, 장수 감영에서도 육십리라 해서 육십령이란 지명이 붙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육십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다 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경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