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덕유산이 어떤 산인가? 이름 그대로 넉넉하고 덕스런 자태로 백두대간 굵은 산줄기를 떠받치고 있는 큰 산 아닌가. 그런데도 그 산에 걸맞는 규모 있고 역사 오랜 절이 없다. 지금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랬다. 그 대신 작은 암자가 많았고, 마치 적막하고 어둔 밤길을 밝히는 호롱불처럼 그 작은 암자들에 점점이 박혀 빛나는 수행으로 불교사의 한때를 수놓은 스님네가 많았다. 그러므로 큰 절이 없을 뿐 훌륭한 수행자가 깃들이기로는 결코 다른 명산대찰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불교의 최고봉으로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려 말부터 서산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은 이렇다. 태고 보우(太古 普愚) → 환암 혼수(幻菴 混修) → 귀곡 각운(龜谷 覺雲) → 벽계 정심(碧溪 淨心) → 벽송 지엄(碧松 智嚴) → 부용 영관(芙蓉 靈觀) → 청허 휴정(淸虛 休靜). 말하자면 조선 초기 선종사(禪宗史)의 꽃들이요 별들이자 불교라는 긴 동아줄이 끊어지지 않고 한 줄로 엮이게끔 묶어 세운 단단한 매듭들이다. 이들 가운데 서산대사를 있게 한 스승 부용 영관(1485~1571)은 13세에 집을 나와 덕유산으로 출가했으며, 9년 동안이나 산 밖을 나가지 않은 채 용맹정진한 바 있다.
영관선사 문하에서 두 명의 걸출한 제자가 나왔으니 한 분이 서산대사요 다른 한 분이 부휴 선수(浮休 善修, 1543~1615)대사이다. 두 분은 당대 불교를 이끌어간 쌍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승려들의 법통(法統)을 거슬러 올라가면 예외 없이 모두 이 두 분에게 닿게 되니 그 무게를 이르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바로 그 부휴선사가 임진왜란 때 이곳 덕유산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 뒤에도 구천동에 다시 들어와 수행과 교화에 진력하였다.
이들 영관, 청허·부휴를 잇는 많은 고승들 또한 덕유산의 너른 품에 의지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서산대사의 4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정관 일선(靜觀 一禪, 1533~1608), 정관의 제자로 시문에 매우 능해 이수광, 이안눌 등 당대 명사들과 교류가 잦았던 운곡 충휘(雲谷 沖徽, ?~1613), 역시 정관의 상족(上足)으로 평생 후학 지도에 전념한 임성 충언(任性 沖彦, 1567~1638), 유·불·도 3교에 능통하여 많은 사람을 지도했던 송파 각민(松坡 覺敏, 1596~1659)스님이 덕유산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부휴대사의 고족으로 스승과 더불어 대불(大佛)과 소불(小佛)로 병칭되기도 했으며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띠고 남한산성 축성을 지휘하기도 했던 벽암 각성대사가 덕유산을 거쳐갔으며, 벽암대사와 동문으로 진정한 은자의 삶을 추구했던 고한 희언(孤閑 熙彦, 1561~1647)선사가 이곳으로 부휴선사를 찾아 법을 물었고, 성삼문의 후예로서 벽암대사의 뒤를 이어 당대 불교계를 주름잡던 취미 수초(翠微 守初, 1590~1668)선사와 ‘불법홍통종사’(佛法弘通宗師)로 추앙받았던 그의 고족 백암 성총(栢庵 性聰, 1631~1700)대사도 한때 여기에서 가르침을 편 바 있다. 그밖에도 모운 진언(慕雲 震言, 1622~1703), 무경 자수(無竟 子秀, 1769~1837), 호의 시오(縞衣 始悟, 1778~1868), 용암 혜언(龍巖 慧彦, 1783~1841) 등 무거운 이름을 울리던 출가수행자들이 덕유산에서 그들 생애의 한시절을 보냈다. 말하자면 덕유산은 불교가 조선 초기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다채롭게 가지를 벋던 시기에 갖가지 꽃을 피워올린 꽃밭이었다 하겠다.
그 꽃밭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던 곳이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백련사(白蓮寺)다. 덕유산의 절들이 으레 그렇듯이 백련사도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어느 땐가 ‘백련암’으로도 불렸다는 데서 그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흥덕왕 5년(830)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역사 기록에서 그 증거를 찾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고, 근대 이전의 역사로서 뚜렷이 전하는 바도 없다. 그나마 옛 자취는 한국전쟁 통에 온 절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몇몇 부도를 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이후 재건한 모습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백련사에서 찾아야 할 것은 절이 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구천동계곡의 자연과, 군데군데 서 있는 부도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여기서 살다간 옛 스님들의 흔적 정도가 된다.
33경을 품에 안고 25㎞나 이어지는 구천동의 끝에 백련사가 있다. 그래서 찾아가는 길이 가깝지 않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시오리를 걸어야 겨우 백련사의 일주문에 닿는다. 하지만 먼 길이 힘들거나 지루하지는 않다. 길 한켠으로 구천동계곡이 새록새록 낯선 모습을 펼치니, 계곡에 무수히 박힌 바위와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 온갖 나무와 풀과 짐승들, 그리고 숲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바람 따위를 벗삼아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일주문은 공포가 대단하다. 외4출목 내5출목으로 짜인 공포가 빼곡하니 처마밑을 채우고 있다. 덕택에 어찌 보면 기둥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지붕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형적인 가분수 집이면서도 아주 눈에 설지는 않게끔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1968년에 지은 건물이다. 그때 세운 것인데 이만한 솜씨를 보임이 놀랍다. 모두 새 건물이 들어선 백련사에서 잠시나마 눈길을 줄 만한 유일한 건물이 일주문이지 싶다.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옆에는 석종형 부도 다섯 기가 나란하다. 그중 가운데 있는 것이 매월당 설흔(梅月堂 雪欣)스님의 부도이다. 부도의 몸돌에 ‘梅月堂雪欣之塔’이라고 음각한 명문이 보인다. 흔히 이것을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로 오인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호가 같은 데서 오는 혼동이다. 그의 행적과 생애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1772년에 만들어진 적상산 안국사 극락전 후불탱화의 화기에 증명(證明)으로 그 이름이 올라 있는 점으로 보아 이쪽 지방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스님으로 추측된다. 1784년에 세워졌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시작되는 길 왼편에 석종형 부도가 또 하나 있다. 정관당 일선대사가 그 주인이다. 서산대사는 많은 눈밝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 가운데 특히 뛰어나 독립된 하나의 문파를 이룬 제자가 넷 있었다. 사명 유정(四溟 惟政), 편양 언기(鞭羊 彦機), 소요 태능(逍遙 太能), 그리고 정관 일선 스님이 그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여 사명대사에게 빨리 관복을 벗고 승려의 본분을 다하라고 충고했던 사람이 정관대사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덕유산에 머물렀고, 죽음조차 이곳에서 맞이했다.
덕유산 너머 거창의 선비 임훈(林薰)은 그의 「덕유산향적봉기」(德裕山香積峰記)에서 자신이 1552년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 오를 때 그곳의 탁곡암(卓谷庵)에 일선스님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부도는 그가 입적한 이듬해 세워졌다. 석종형 부도라고는 하나 몸돌은 길숨한 원통형에 가깝고, 다만 윗부분을 꽃봉오리처럼 공글렸을 따름이다. 대좌에만 연꽃 무늬가 소략하게 놓였을 뿐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지붕돌도 없다. 그 이름이 일세를 흔들던 스님의 부도치고는 초라하다 싶을 만치 간결하다. 오히려 이런 모습 속에서 사명대사에게조차 어서 산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던 스님의 수행에 초연했던 자세를 되새길 수 있을 듯하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이다.
102호이다.
정관당 부도서산대사의 제자로 젊은 때부터 덕유산에 머물며 속세를 등진 채 수행했던 정관스님의 부도이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절 뒷산 언덕에 또 다른 부도가 하나 더 있다. ‘백련사 계단’(白蓮寺戒壇)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어 있긴 하나 무엇을 근거로 ‘계단’이라 부르는지는 명확치 않다.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 방등계단은 나름대로 뚜렷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형태도 일반 부도와는 격이 다르다. 하지만 ‘백련사 계단’은 석종형 부도의 일반형일 뿐이고, 다르다면 크기가 좀 크다는 정도다. 아무래도 조선시대 언젠가 세워진 어느 스님의 부도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높이 약 2m, 둘레 약 4m에 이르는 우람하고 듬직한 자태가 믿음직하다.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이 부도의 주변을 일곱 번 이상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전하고 있어 적잖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도 한다.
백련사 계단조선시대 흔히 볼 수 있는 석종형 부도로 그 크기만 조금 클 뿐인데 무슨 근거로 계단이라 부르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백련사에는 빼어난 건물이 있는 것도 우수한 석조물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밖의 유다른 볼거리가 있지도 않다. 하니 백련사 가는 길은 골골이 펼쳐지는 구천동계곡의 경치를 즐기며 걷는 산책의 길, 덕유산의 너른 품에서 은자처럼 살다간 수행자들이 걸었던 옛길을 되밟아가는 사색의 길로 삼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련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홍선,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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