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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세상이야기

도연명의 귀거래사

by 사니조은 2012. 6. 12.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여 (귀거래혜) 돌아가야지

田園이 將蕪하니 胡不歸오 (전원장무호불귀) 논밭이 묵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하니 (기자이심위형역)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 받았거니

奚惆愴而獨悲오 (해추창이독비) 어찌 홀로 근심에 슬퍼하고 있으리

悟已往之不諫하고 (오이왕지불간) 지난날은 돌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知來者之可追라 (지래자지가추) 이에 앞으로는 그르치는 일 없으리

實迷途其未遠하니 (실미도기미원) 길이 어긋났으나 멀어진 건 아니니

覺今是而昨非로다 (각금시이작비) 지난 날은 그렀고 이제부터 바르리

舟遙遙以輕颺이오 (주요요이경양) 고운 물결 흔들흔들 배를 드놓이고

風飄飄而吹衣로다 (풍표표이취의) 바람 가벼이 불어 옷자락을 날리네

問征夫以前路하니 (문정부이전로) 지나는 이에게 앞길 물어 가야하니

恨晨光之熹微로다 (한신광지희미) 희미한 새벽빛에 절로 한숨이 나네

乃瞻衡宇하고 (내첨형우) 어느덧 이르러 집이 바라다 보이니

載欣載奔하니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달리듯이 집으로 가네

僮僕은 歡迎하고 (동복환영) 사내아이 종 나와 반가이 맞이하고

稚子는 候門이라 (치자후문) 어린 아들 문 앞에 기다려 서 있네

三徑은 就荒이나 (삼경취황) 세 갈래 오솔길에 잡초 우거졌어도

松菊은 猶存이라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네

携幼入室하니 (휴유입실) 어린 아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서니

有酒盈樽일세 (유주영준) 술항아리 가득히 술이 나를 반기네

引壺觴以自酌하고 (인호상이자작) 술병과 술잔 끌어당겨 혼자 마시며

眄庭柯以怡顔이라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무를 지그시 보며 미소짓네

倚南窓以寄傲하니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멋대로 있노라니

審容膝之易安이라 (심용슬지이안) 작디작은 방이지만 편하기 더 없네

園日涉以成趣하고 (원일섭이성취)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풍치가 있고

門雖設而常關이라 (문수설이상관) 문은 나 있으나 늘 닫아 두고 있네

策扶老以流憩라가 (책부노이류게) 지팡이 짚고 가다가는 쉬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하니 (시교수이하관) 때로는 머리 들어서 멀리 바라보네

雲無心以出岫하고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골짝을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이니라 (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저 새 돌아올 줄을 아네

景翳翳以將入하니 (경예예이장입) 저 해도 어스름에 넘어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이로다 (무고송이반환) 서성이며 홀로 선 소나무 쓰다듬네

歸去來兮여 (귀거래혜) 돌아가자

請息交以絶遊라 (청식교이절유) 사귐도 어울려 놀음도 이젠 그치리

世與我而相違하니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復駕言兮焉求리오 (부가언혜언구) 다시 수레에 올라서 무엇을 구하리

悅親戚之情話하고 (열친척지정화) 친한 이웃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

樂琴書以消憂로다 (낙금서이소우) 음악과 글을 즐기며 시름을 삭이리

農人告余以春及하니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리니

將有事於西疇로다 (장유사어서주) 서쪽 밭에 나가서 일을 하여야겠네

或命巾車하고 (혹명건거) 때로는 천막을 두른 수레를 몰아서

或棹孤舟하야 (혹도고주) 때로는 외로운 배의 삿대를 저어서

旣窈窕以尋壑하고 (기요조이심학) 깊고 굽이져 있는 골짝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하니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길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네

木欣欣以向榮하고 (목흔흔이향영) 물오른 나무들은 꽃을 피우려 하고

泉涓涓而始流라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퐁퐁 솟아 졸졸 흘러내리네

善萬物之得時하고 (선만물지득시) 모두가 철을 만나 신명이 났건마는

感吾生之行休로다 (감오생지행휴) 나의 삶 점점 더 저물어 감 느끼네

已矣乎라 (의호) 말지어라

寓形宇內復幾時오 (우형우내부기시) 세상에 몸이 다시 얼마나 머무르리

曷不委心任去留하니 (갈불위심임거류) 가고 머뭄을 자연에 맡기지 않고서

胡爲乎遑遑欲何之오 (호위호황황욕하지)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 하는가

富貴는 非吾願이오 (부귀비오원) 부귀는 내가 바라던 바도 아니었고

帝鄕不可期라 (제향불가기) 신선 사는 땅은 기약할 수 없는 일

懷良辰以孤往하고 (회양진이고왕) 날씨 좋기 바라며 홀로 나아가서는

或植杖而耘耔라 (혹치장이운자) 지팡이 세워두고 김 매고 북돋우네  (: 둘 치)

登東皐以舒嘯하고 (등동고이서소) 언덕에 올라가서 길게 휘파람도 불고

臨淸流而賦詩라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보네

聊乘化以歸盡하니 (요승화이귀진) 자연을 따르다 죽으면 그만인 것을

樂夫天命復奚疑아 (낙부천명부해의) 천명을 누렸거늘 더 무엇 의심하리

 

 

 

 

 

 

 

 

()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 잠().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遊戱文學)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對句的技巧)나 전거(典據)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謝靈運)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나라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서는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儲光羲)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그리고 양()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문선(文選)》에다 9 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이후 판본(版本) 및 주석서가 나왔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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