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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세상이야기

숭례문 관련,,, 최용완씨의 이야기

by 사니조은 2008. 2. 16.
“내 집이 불타고, 내 가족이 죽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1961년 숭례문 중수공사는 내 젊음을 불사른 건축 사업이었다”

“건축가로서의 47년 경험과 아직도 심장에 남아있는 당시의 정열을 복원에 쏟아붓고 싶다. 정부가 불러만 주면 언제든 달려가겠다”

1961년 숭례문의 중수 공사에 참가했던 재미동포 최용완(69)씨는 1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실측하면서 만든 스케치북과 중수하기 전의 기록, 복원 도면을 만들기 위해 작업한 개인 노트, 문양 등의 탁본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며 “이 모든 자료들이 향후 복원 공사에 활용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에 사는 최씨는 “숭례문은 조선시대 건축술의 정수가 녹아든 걸작”이라며 “당시에는 부재(部材)들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았음에도 선조들은 각기 다른 크기의 부재들로 조화를 이뤄내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부재는 토목이나 건축에서 기본 뼈대를 이루는 여러 재료를 말한다.

최씨는 서울대 건축학과를 막 졸업할 무렵에 당시 김정수 교수의 추천으로 중수 공사에 참여했다. ’고전 한국건축 양식’이란 졸업논문을 제출했던 그는 도편수인 조원재씨 등과 함께 2년6개월 동안 공사에 참여했다.

한국일보에 ’중수 공사 중간보고’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하기도 했던 그는 공사가 끝난 뒤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불국사 보수 공사를 관리.감독하기도 했다.

잘나가던 젊은 건축가의 길을 포기하고 미네소타대로 유학을 떠난 최씨는 석사학위를 받고 현지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 결혼해 그 곳에 주저앉았다.

최씨는 숭례문 복원시 국보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란과 관련 “중수 때에도 교체된 부재가 35%다. 목조 문화재는 일정 시간이 흐르면 목재를 교체해 줘야 한다”며 “수백년 전 목재가 남아 있느냐가 아니라 당시 건축술이 유지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입력 : 2008.02.15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