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숭례문 누각에서 발생한 불길이 잡히지 않자 박창기·박성규 소방교가 굴절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 현판을 떼어내고 있다<左>. 그러나 이들은 현판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뜨렸다<右>. [사진=김태성 기자] | |
이런 국보 1호의 ‘이름’을 살려낸 데는 두 소방대원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인공은 서울 중부소방서의 박창기(38·右)·박성규(35·左) 소방교. 하지만 13일 소방서에서 만난 두 대원의 표정은 어두웠다. “현판을 살려냈다는 자랑스러움보다 숭례문을 못 지켰다는 죄스러움이 더 크다”며 괴로워했다.
◇“현판이라도 살리자”=“현판이 바닥에 떨어졌을 땐 눈앞이 캄캄했어요.” 두 소방대원은 괴로운 듯이 당시를 회상했다. 10일 오후 10시40분, 숭례문 2층 누각의 천장을 태운 불길은 바깥을 향해 기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때 진화작업을 하던 박창기 소방교의 눈에 숭례문 현판이 들어왔다. “곧 불길에 휩싸일 것처럼 위태위태했어요. 현판이라도 살리지 않으면 하나도 남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죠.”
박성규 소방교 역시 “지나다니며 늘 보던 현판이었지만 이때만큼 안타깝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둘은 오용규 진압팀장에게 “현판부터 떼자”고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그러곤 굴절차를 타고 현판에 다다랐다.
현판의 네 구석은 처마와 쇠갈고리로 연결돼 있었다. 먼저 한쪽 위아래에 박힌 갈고리 2개를 빼냈다. “남은 쪽 위 갈고리를 떼려는 순간 아래쪽 갈고리가 저절로 빠지며 현판이 획 돌아갔다”고 박창기 소방교는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육중한 현판은 순식간에 이들의 손에서 빠져나가 ‘쿵’ 하고 떨어졌다. 박창기 소방교는 한동안 넋을 잃은 채 고개를 떨궜다. 떨어진 현판은 10명이 함께 들어서 현장 밖으로 옮겨야 했다. “그렇게 무거운 현판은 처음이었어요. 예전 화재 때 다뤘던 현판들과는 비교가 안 됐다”고 설명했다.
현판 가운데에 금이 갔고 모서리가 부서졌다. 현판의 추락을 본 네티즌들은 분노의 댓글을 인터넷에 쏟아냈다. 박창기 소방교는 “‘현판을 내동댕이쳤다’며 우리를 비난하는 글들을 보면서 안타깝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박성규 소방교는 “현판에 금이 갔다는데 우리 잘못인 것 같아 안타깝다”며 “다시 복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현판이 보관돼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의 이기용 유물과학과장은 “타버렸을 경우를 생각한다면 천만다행”이라며 “모서리와 글씨 일부가 훼손됐지만 현장에서 조각들을 찾아가고 있어 복원에는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해머에도 끄덕 않던 기와”=현판을 떼낸 둘은 지붕으로 향했다. 지붕의 기와를 뚫고 소방수를 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숭례문의 기와는 철옹성이었다. 기와와 사투를 벌였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기와를 해머로 내리치면 불꽃이 튀길 정도로 강했다”는 것이다. 지붕 뚫기를 포기해야 했다. 결국 숭례문은 화마에 쓰러졌다.
이들은 “구조대 생활 9년 만에 이처럼 무력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다. 숭례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지금도 잠이 안 온다”고 털어놓았다.
두 소방교는 육군 특전사 선후배 사이다. 1999, 2000년 나란히 119 구조대에 특채됐다. 10년 가까이 사고 현장을 누비며 만능 해결사로 활약했지만 숭례문 화재는 큰 좌절을 안긴 것이다.
글=이충형·정선언 기자
◇숭례문 현판=1398년(조선 태조 7년) 완공된 숭례문의 현판으로 해서체로 된 ‘崇禮門’이란 글씨가 세로로 쓰여 있다. 서울의 다른 세 대문과 달리 현판을 세로로 쓴 이유는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현판 글씨를 쓴 이는 확실치 않지만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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