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권은 빼재~육십령까지… 북덕유는 육산, 남덕유는 골산의 형세
백두대간 덕유산권은 속리산에서 내려온 한반도 산줄기를 빼재(신풍령 또는 수령)에서 이어받아 육십령~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연결해 주는, 식생학적으로나 산지체계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높이 면에서도 덕유산(德裕山·1,614m)은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네 번째이며, 최고봉은 향적봉이다.
덕유산은 산세와 위치로 흔히 북덕유와 남덕유로 구분된다. 북덕유는 이름처럼 넉넉하고 웅장한 육산(肉山)인 반면, 남덕유는 장쾌하고 힘찬 골산(骨山)이다.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원래 덕유산은 현재 무주의 북덕유산을 나타내고, 남덕유산은 봉황봉을 가리킨다. 갈천 임훈(林薰·1500~1584)의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와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도 조선시대에는 남덕유산을 황봉(黃峰), 무룡산을 불영봉(佛影峰)이라 했으며, 최고봉인 향적봉과 함께 덕유산의 3대봉이라 불러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덕유의 황봉은 봉황봉으로도 불렸다.
덕유평전에서 남덕유 방향으로 너울 지듯이 굽이쳐 있는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덕유산은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이 덕유산은 한반도에서 삼도의 중점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으며, 행정적 경계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된다. 지정학적 요충지는 고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라, 가야, 백제의 접경지가 바로 덕유산이었다. 그 대표적인 지명이 덕유산 북쪽에 위치한 백제와 신라의 관문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였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다. 지금 구천동 33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삼국통일 시기에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던 길목에 세워져 ‘통일문’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삼도의 경계는 수계로도 연결된다. 덕유산은 낙동강의 지류가 되는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하천도 여기서 발원한다. 즉 낙동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인 것이다.
명재 윤증(尹拯·1629~1637)이 1652년(효종3) 24세 때 덕유산을 유람한 후 남긴 장편 시문(詩文)인 ‘유여산행(遊廬山行)’에서 ‘여산은 곧 금산군 안성현에 있는 덕유산의 별명이다. 토산이면서 매우 거대하며, 호남과 영남 지방 사이에 웅거하고 있다. 내가 3일 동안 이 산의 안팎을 두루 돌아보고 돌아와 이를 기록하고, 이 시편을 짓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볼 때 덕유산의 별칭은 여산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여산은 중국 강서성 구강시 남쪽 파양호 근처에 있는 천하 명산을 가리킨다. 일명 광산(匡山), 또는 광려산(匡廬山)이라고도 한다. 덕유산이 그 명산과 견줄 만큼 깊고 신령스럽다는 것이다.
덕유산권은 대체로 빼재~육십령 27.4km 구간
깊고 신령스러운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덕유산으로 피신해 왔다.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면 짙은 안개가 드리워 산속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 안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여산의 신비로움으로 사람들은 덕이 있는 넉넉한 산이라 하여 덕유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무룡산에서 삿갓재로 내려오는 등산로에서 솜털 같은 구름이 가을의 정취를 더욱 느끼게 한다.
또 조선시대 <정감록>에는 십승지(十勝地)의 한 곳으로 꼽고 있다. 정감록에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비장처에는 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에 원학동이 있는데, 숨어살 만한 곳이다’고 적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은거하며 살았던 산으로 전한다.
산이 깊으면 식생도 그만큼 뛰어나다. 덕유산에는 주요 식물만 꼽더라도 주목, 구상나무, 신갈나무, 철쭉, 서어나무, 졸참나무, 들메나무, 함박꽃나무, 산수국, 백작약, 동자꽃, 난쟁이바위솔, 바위채송화, 관중, 광릉요강꽃, 너도바람꽃, 털진달래 등이 넓게 분포하며 자라고 있다.
특히 멸종위기야생식물Ⅰ급인 광릉요강꽃, Ⅱ급인 복주머니란, 특정식물종인 솔나리, 자주솜대, 흰참꽃나무, 모데미풀 등이 다수 분포해 있다. 서봉 일원에 분포하는 덕유산국립공원 깃대종인 구상나무군락지가 있으며, 덕유산이 구상나무의 북방한계선에 해당한다. 현재는 향적봉, 남덕유산, 서봉, 무룡산, 삿갓봉을 중심으로 한 북사면에 주로 자생하고 있다. 그 외 멸종위기 야생생물로는 수달, 붉은박쥐, 하늘다람쥐, 무산쇠족제비, 감돌고기, 검독수리, 잿빛개구리매, 긴꼬리딱새, 꼬마잠자리, 멋조롱박딱정벌레 등이 서식하고 있다.
덕유산의 주요 식생과 지명 등 현장을 확인하기 위한 답사는 빼재와 설천봉을 두고 저울질한다. 빼재는 덕유산권의 백두대간 출발점이다. 대체로 백두대간 덕유산권은 빼재에서 육십령까지 27.4km를 말한다. 빼재로 37번국도가 지난다. 한때는 이 도로로 인해 동식물의 생태로가 단절됐지만 지금은 산림청의 산림생태축 복원 관련 ‘산림행정 3.0’ 국정과제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관통하는 도로에 생태터널을 연결해 로드킬 당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동식물의 활동영역을 넓혀 주고 있다. 빼재도, 육십령도 생태터널이 완공된 구간이다.
빼재 고갯마루와 일부 지도엔 빼재를 수령(秀嶺)으로 표시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잘못된 지명이라고 말한다. 원래 이 고개 부근에는 사냥꾼과 도적들이 많아 그들이 잡아먹은 동물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이 ‘뼈재’라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뼈재가 경상도 발음으로 빼재가 됐는데, 이 고개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면서 빼어날 ‘수(秀)’자를 썼다고 입을 모은다. 빼재의 또 다른 이름 신풍령(新風嶺)은 추풍령을 본 떠 바람도 쉬어 넘는 새로운 고개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명칭인 상오정고개는 고갯마루 북쪽 무주에 있는 상오정마을에서 빌어와 붙인 것이다.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가는 등산로 옆에 운치 있는 주목이 등산객들의 눈길을 끈다.
한국의 대표적 多雪多雨 지역
빼재 주변을 둘러보고 고민하다 향적봉으로 향했다. 비록 향적봉은 백두대간 능선을 살짝 벗어나긴 했지만 덕유산 최고봉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향적봉 부근에는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주목을 향목(香木) 또는 적목(積木)이라고 한다. 조선 명종 7년(1552) 갈천(葛川) 임훈의 <등덕유산향적봉기>에 보면 ‘향림(香林 : 주목을 일컬음)이 즐비하게 있으므로 산봉우리 명칭을 향적봉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또한 ‘이 나무를 향나무라 하면서 어찌 잎에서 향기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안내하는 스님이 대답하기를 이 향목은 미륵불이 이 세상에 와서 살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향기가 나게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향적봉 이름에 대한 유래다.
설경과 어울린 향적봉의 주목은 겨울을 나타내는 대표적 장면 중의 하나다. 덕유산은 작은 히말라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설경을 자랑한다. 향적봉에서 중봉에 이르는 구간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구상나무와 주목에 핀 설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이같이 덕유산 일대는 어느 산 못지않게 눈이 많이 내린다. 가장 큰 이유는 백두대간이 한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동과 서로 가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의 확장으로 서해를 건너며 수증기를 흠뻑 머금은 대기는 빠른 속도로 내륙으로 진입한다. 이때 높은 장벽을 이룬 덕유산의 산사면을 타고 강제 상승한 대기가 단열·팽창해 냉각됨으로써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이다. 덕유산 능선을 중심으로 무주의 적상산, 두문산, 거창의 투구봉, 대봉 등도 겨울철 눈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 지역은 여름철 강우량도 같은 이유로 많다. 한국의 대표적인 다설다우(多雪多雨)지역이다.
덕유산의 풍부한 식생을 잘 보여 주는 장면. 구상나무와 주목이 어울려 있고, 중간에 참나무 군락도 보인다. / 사진 덕유산국립공원 제공
향적봉 주변엔 주목과 함께 덕유산이 북방한계인 구상나무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에서만 자생하고 있다. 향적봉 일대는 구상나무뿐만 아니라 북방계 고산식물들이 많이 자란다. 두메닥나무, 선좁쌀풀, 나도바람꽃, 족도리풀, 덩굴개별꽃, 꿩의다리, 모데미풀, 동의나물 등이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봄에는 처녀치마, 금강애기나리, 동의나물, 철쭉, 진달래가 만발하고, 여름에는 원추리, 물봉선, 동자꽃, 말나리, 가치수영, 산오이풀, 짚신나물 등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가을엔 산부추와 구절초, 쑥부쟁이, 돌쩌귀, 용담 등이 꽃의 향연을 벌인다.
그러나 산죽(일명 조릿대)의 군락 확대로 이 식물들의 서식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산죽이 끊임없이 서식지를 넓히고 있다. 관목으로서의 조릿대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정말 심각할 정도다. 조릿대가 많다는 사실은 이미 생태균형이 무너졌다는 반증이다. 이른 봄 조릿대의 새순, 즉 죽순을 먹어 없앨 산토끼나 노루 등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엄청나게 줄었기 때문이다. 조릿대 군락에 질세라 철쭉도 기세 싸움을 벌이고 있다. 덕유산 철쭉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군락인데, 조금 밀리는 듯한 느낌이다.
머지않아 식생 파괴하는 조릿대 뉴스에 오르내릴 듯
향적봉 일대부터 넓은 덕유평전이 펼쳐진다. 덕유평전은 지리산의 세석평전, 소백산의 소백평전과 더불어 한국의 3대 고산평원이다. 1,500m 내외의 고지에서 이렇게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어떻게 해서 1,000m 이상의 고도에 이렇게 드넓은 구릉성의 평원이 생겨났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은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에서 동해의 해저 지각이 확장하면서 대륙 지각을 밀어붙이자 횡압력을 받으며 대대적인 습곡 및 요곡운동이 일어난 영향이라고 주장한다. 이로 인하여 한반도는 대대적으로 융기하게 되는데,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경동지형을 이루게 된다.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는 이때 솟아오른 것이라고 한다.
1 덕유산 등산로 주변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는 식물은 조릿대였다. 조릿대가 급속히 그 영역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2 하늘거리는 가을 억새를 옆에 두고 한 등산객이 무룡산으로 오르고 있다. 3 삿갓봉에서 향적봉과 중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덕유평전에서는 특히 각시원추리, 골잎원추리, 노란원추리 등 원추리(백합과 식물)들이 무리지어 자란다. 원추리가 노랗게 꽃을 피우는 6~8월이면 덕유평전은 온통 노란꽃 세상이 된다. 원추리는 해발 1,000m의 높은 지역의 아고산대에서 잘 자라며, 지리산 노고단, 소백산 비로봉 등지에서도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지금은 땅 속에서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중봉에 이어 송계삼거리 백암봉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다시 백두대간 능선으로 합류한다. 굽이쳐 흐르는 능선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 능선이 정말 너울같이 출렁이는 듯하다. 백두대간 종주나 답사가 힘들기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순간 힘든 건 잠시 잊는다.
동엽령까지 그대로 내달린다. 동엽령은 옛날엔 영호남 사이의 큰 장사길이었으며, 일명 동업이재라고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토산품을 교역하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지만 지금은 등산객이 오가는 등산로일 뿐이다.
덕유산의 모든 등산로가 사계절 내내 개방되는 건 아니다. 총 16개 구간의 등산로 중에 연중 상시 개방구간은 서창탐방지원센터~안국사, 설천봉~향적봉, 구천동탐방지원센터~백련사~향적봉, 황점~삿갓골재까지 4개 구간이다. 나머지 12개 구간은 매년 산불조심기간인 11월 15일~12월 15일, 3월 1일~4월30일 통제한다. 이에 해당하는 구간은 치목~안국사, 인월담~설천봉, 향적봉~영각탐방지원센터, 백련사~중봉, 신풍령~횡경재, 송계사~횡경재~백암봉, 안성탐방지원센터~동엽령, 황점~월성재, 육십령~남덕유산, 병곡~동엽령, 양악~월성재, 안국사~남문지 등이다. 12월 15일까지는 등산객들이 개방여부를 잘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간혹 등산로 옆에 소규모 군락으로 피어 있는 억새들이 늦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욱 느끼게 한다. 등산로 주변은 조릿대가 너무 심하게 확산되어 있다. 안타깝다. 머지않아 식생을 파괴하는 조릿대가 뉴스에 오르내릴 것만 같다. 그러면 무슨 대책이 나오려나.
덕유산 서봉(장수덕유산) 일원에서 구상나무가 대형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구상나무는 덕유산이 식생 북방한계선이다. / 사진 덕유산국립공원 제공
광릉서 300km 떨어진 이곳에서 광릉요강꽃 발견
덕유산 백두대간 마루금은 나침반이 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등산로가 뚜렷하다. 등산로 정비도 잘 돼 있어 ‘알바’할 우려가 전혀 없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걷기만 하면 된다. 정말 이름 그대로 넉넉한 산이다. 푸근하기까지 하다. 전형적인 육산의 모습을 보여 준다.
덕유산 일대에서 자라는 국화과 식물 중에 금방망이가 있다. 그동안 한라산 정상에서만 살아남은 빙하기 잔존식물로 알려져 왔다. 이후 희한하게 덕유산 능선과 태백산 일대에서 발견됐다. 또 광릉요강꽃도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경기도 광릉에서 발견돼, 지명을 그대로 딴 식물이다. ‘요강’이라는 이름은 꽃 모양에서 유래했다. 다른 이름은 치마난초인데, 잎에 난 주름과 잎 모양이 치마를 연상하게 해서 붙여졌다. 광릉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경기도 북부의 명지산, 천마산, 포천, 화천 등지에서 추가로 확인됐다. 식물학자들은 이 식물이 어떻게 해서 300여 km 떨어진 덕유산에서 발견됐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이윽고 무룡산(舞龍山·1,492m)이다. 거창군 북상면 산수리에 위치하며, 무주군 안성면과 경계를 이룬다. 산수마을 사람들은 ‘흰덤뿌대기’라고 부르는 깨끗하고 신령스런 산이다. 옛 이름이 불영봉이다. 산 양쪽으로 삿갓골재와 동엽령(동엽이재)를 안고 있다.
덕유산은 마루금이 명확히 드러나 봉우리 어디서나 너울지는 능선 조망이 가능하다. 무룡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북덕유와 남덕유의 우아한 곡선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남덕유로 향하는 등산로 앞에 삿갓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말 그대로 삿갓봉이다. 그 아래는 삿갓골이다. 산세가 날카롭고 삿갓 모양이라 붙여졌고, 거창에서 무주로 통하는 길목이다. 삿갓재대피소는 종주하는 등산객을 위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10여 년 전에 건립했다. 다른 대피소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삿갓재대피소 입구에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여기서 이런 문구를 보다니…. 미소가 지어진다. 산에 노니는 것이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1 솔나리 2 솔체꽃 3 광릉요강꽃 4 모데미풀 5 복주머니란 6 자주솜대.
삿갓봉(1,419m)으로 올라서면 북덕유와 완전 다른 산의 형세를 보여 준다. 북덕유에서 밟고 왔던 육산이 삿갓봉에 접근하면서부터 악산이 갑자기 나타난다. 같은 산줄기이면서 이렇게도 달랐다.
월성재와 남덕유~서봉(장수덕유산)까지 이어지면서 장쾌하고 힘찬 골산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월성재는 고갯길 정상부가 반달모양을 닮아 월성치, 혹은 월성현(月城峴)이라 불린다. 지금은 등산로 구실만 하고 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고갯길이었다. 남덕유(1,507m)는 암벽 위에 정상이 있다. 기(氣)가 우뚝 솟아 있는 형세다. 옛날에 황봉, 또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렸다.
육십령은 굽이만큼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어
남덕유산 일대에서 철쭉 비슷한 가지를 지닌 관목이 유달리 많이 보인다. 흰참꽃이라는 진달래과의 떨기나무다. 이 식물도 알고 보면 매우 특이하다. 세계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지리산·가야산·남덕유산 정상 일대의 바위지대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이다. 꽃이 흰색으로 매우 작다.
덕유산 일대에서 고산식물 또는 북방계 식물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서봉과 남덕유산 일대다. 등대시호, 솔나리, 땃두릅나무, 구름병아리난초, 가야산은분취, 참바위취, 큰앵초, 개회향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남덕유산의 솔나리는 가야산, 구미 금오산과 함께 이 식물의 남방한계선을 형성해서 자라고 있다. 등대시호 역시 남덕유산이 분포의 남방한계선이다. 남한에서는 설악산과 소백산 도솔봉, 속리산 등지의 바위지대에만 분포하는 식물로서 솔나리보다 생육지나 개체수가 적은 식물이다.
장수덕유산(서봉)에서 할미봉을 거쳐 육십령까지 가는 등산로는 밧줄이 없으면 오르기 힘든 구간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산로에 거친 암벽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구간이 많이 초보 등산자에게는 매우 힘든 코스다.
대포바위~할미봉을 거쳐 백두대간 덕유산권의 마지막 목적지인 육십령에 도착했다. 육십령도 일제시대 때 단절된 백두대간 마루금을 국정과제 ‘산림행정 3.0’의 적극 추진으로 생태터널을 복원해서 개통했다. 동식물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육십령은 옛날에는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 불렀다. 해발 734m로 고갯길이 높아 그렇게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육십령은 남북으로 지리산과 덕유산, 동서로는 호남과 영남을 이어주며, 옛날에는 백제와 신라의 군사 요충지인 곳이었다. 육십령에 관한 유래는 그 굽이만큼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우선 안의 감영과 장수감영에서 60리라 해서 붙여졌다는 설,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다는 설, 옛날 산적이 많아 산 아래 주막에서 60명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떼를 지어 넘어야 화(禍)를 면했다는 설, 일제시대엔 재몬당까지의 고개가 60개라 하여 육십령이라 붙여졌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백두대간 덕유산권은 설천봉에서 출발해 향적봉~중봉~동엽령~무룡산~삿갓봉~월성재~남덕유산~서봉(장수덕유산)~할미봉을 거쳐 육십령까지 24.4km를 답사했다.
백두대간 자원조사 연구책임자 상지대 조우 교수
“풍부한 식생·생태축 확인… 자연·문화유산 국제사회 널리 알려야”
남한 지역 백두대간은 전체 1,400㎞ 중에서 684㎞를 차지한다. 백두대간 법률 제정 10년을 맞아 산림청에서는 ‘산림행정 3.0’ 국정과제 일환으로 산림생태축 복원이라는 목표를 세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설악산권, 태백산권, 속리산권, 덕유산권, 지리산권 총 5개 권역으로 나눠 2011~2015년까지 조사하고 있다. 백두대간 자원조사 연구 책임자는 상지대 관광학부 조우 교수가 맡고 있다.
“1980년대 녹색연합에서 백두대간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엔 현장조사 없이 문헌과 자료로만 집대성했습니다. 그 뒤 식생과 동물상, 등산로 등 실태조사의 필요성이 여러 모로 대두됐습니다. 산림청에서 조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료도 워낙 방대하고 시간도 워낙 오래 걸렸습니다. 지난 8월 백두대간 첫 국제심포지엄이 열린 것도 백두대간을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릴 필요성이 있어 개최한 겁니다. 이런 조사와 자료, 심포지엄 등을 통해 백두대간의 가치를 인정받고 나아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사 결과를 모아 2015년엔 종합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이와 동시에 남한 지역의 산지의 정확한 실태를 확보하기 위해 백두대간뿐만 아니라 9개 정맥도 조사하고 있다. 2009년 낙동정맥, 2010년 호남정맥·금남정맥, 2011년 금북정맥·한남금북, 2012년 낙남정맥, 2013년 금남정맥·한남정맥, 2014년 한북정맥을 조사한 뒤 그해 연말에 종합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조사한 결과, 백두대간에 서식하는 식물은 남한 전체 4,071종의 33%에 해당하는 총 1,326종이고, 한국 고유특산식물은 총 407종 중 27%인 108종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주요 생태축으로 기능하며, 대륙의 야생 동·식물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통로이자 서식지로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백두대간은 자연생태적 측면만이 아니라 산계의 연속으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지리적으로 일체감을 갖게 하는 인문지리적 측면, 민족정기의 상징이며, 주요 산마다 수려한 경관과 불교문화 및 샤머니즘 민간신앙의 존재를 확인하게 한 문화적 측면 등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조우 교수는 “백두대간은 자연생태와 인문사회, 문화 등에 있어 우리 민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문화적 유산이며, 미래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치를 지닌 자산이다. 백두대간을 조속히 국제사회에 알리고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위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발굴할 논리를 시급히 개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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